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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는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를 비구승단의 상수제자로 삼으셨듯이 비구니승단에서도 지혜가 수승한 케마와 신통이 자재한 우팔라와나라는 두 여성제자들을 타의 귀감이 될 만한 수제자로 삼으셨다. 부처님께서 비구승가와 비구니승가의 운영체제를 같이 하셨다는 점도 여기서 눈여겨볼 만하지만, 그보다도 여성이 남성의 예속물로 받아들여지던 사회적 배경 속에서 출가여성들도 삼보의 하나로서 공경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셨던 점을 생각해보면, 이 위대한 성자의 지혜와 자비에 대해 어떻게 감사를 다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혜제일의 비구니인 케마는 출가 전에 빔비사라왕의 왕비였다. 부처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 신통력을 사용하신 경우가 더러 있었는데 케마가 불법에 귀의하게 된 경우에도 그렇다.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을 사용하더라도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여 그의 감정을 조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달음과 지혜를 북돋우기 위해서 사용하셨다. 인류의 행복을 위해 번뇌의 멸진만을 목적으로 삼았을 뿐 신통의 획득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으신 면모도 우리 부처님의 크신 성자다운 모습이리라.
케마는 고요한 연못에 비친 보름달처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두 볼은 연꽃잎처럼 부드러웠고 눈망울은 보석처럼 빛났다고 한다. 너무도 아름다워서 누구나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기뻐질 정도였다고 하니 그 아름다움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녀의 남편인 빔비사라왕은 죽림정사를 지어 부처님께 바칠 정도로 신심이 깊었다고 하나, 케마는 부처님께 가까이 다가가기를 싫어했던 모양이다. 부처님께서 육체적·외형적 아름다움과 관능적·감각적 즐거움에 대해 호평하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케마는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즐기려고 죽림정사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나무에는 다람쥐들이 뛰놀고 있었고 연못에는 수련이 그득 피어 있었으며 산들바람을 타고 자스민향이 코 끝에 감돌고 있었다. 길을 걷던 케마는 죽림정사의 강당 쪽에서 그 어떤 근원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을 느끼게 하는, 깊고 맑고 향그러운 목소리가 울려오는 것을 들었다. 그 음성은 예전에 듣던 어떤 목소리와도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아침햇살에 실려오는 새소리보다도 아름다웠고, 정겨우면서도 평온하며 어딘지 모르게 사랑과 보살핌이 느껴지는 음성이었으며, 그 말씀의 내용은 알알이 지혜의 구슬과도 같았다. 케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처님의 법음이 울려나오는 강당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부처님께서 왕비의 신분인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얼굴을 가리고 강당의 뒷자리에 앉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부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다는 것을 정작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을 이용하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의 형상을 지어내어 당신 곁에 서서 부채질을 하게 하셨다. 케마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저렇게 이목구비가 잘 생기고, 저렇게 팔다리가 어여쁜 미녀가 있었다니. 흠잡을 데 없는 저 자태, 마치 봄날에 활짝 핀 꽃과 같구나. 내가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본 적이 있었던가!"
바로 그 순간에 케마의 눈앞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여인에게서 서서히 아름다움이 시들어가면서 노쇠의 그림자가 찾아들었던 것이다. 얼굴에 주름살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연꽃잎 같은 입술에 피어났던 미소는 어디로 사라지고 이가 빠진 노파의 히죽거리는 웃음이 드러났으며, 머리카락도 잿빛이 되어 마침내 하얗게 세었다. 노파는 결국 사지가 허약해져서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숨을 거둔 뒤에는 시신이 썩어 문드러지더니 남은 뼈마저도 먼지로 변해 흩어져버리는 것이었다. 부처님의 신통력이 지어낸 이런 기이한 이미지를 지켜보고서 케마는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에 서게 된다. "저 아름다운 여인이 저렇게 무너져 내리다니, 그렇다면 내 몸도 그런 운명을 피할 수 없지 않은가?"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에 허영을 부리던 마음이 사라지고 그 모든 것이 헛것임을 깨닫고서, 그녀는 문득 육체와 생명의 무상을 뼈저리게 느꼈다.
케마는 이때 아라한과를 얻고 곧 빔비사라왕의 승낙을 받은 뒤 비구니승단에 들어갔다. 그녀가 모든 비구니들 중에서 지혜제일로 알려지게 된 데에는 그만큼의 치열한 깨달음이 바탕이 된 것이다. 육신에 대한 집착을 떼기 위한 부정관(不淨觀)의 방편과 자아에 대한 그릇된 실체사고를 씻기 위한 무상관(無常觀)의 방편이 수행에 있어서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겠다.
보통 사람들은 케마의 이러한 깨달음의 기연(機緣)을 읽으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하고 다소 의아해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부처님께서는 케마가 우연히 해탈을 얻었거나 운이 좋아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여러 생 이전부터 계정혜의 씨앗을 뿌려온 공덕 때문에 그럴 수 있었노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전생에는 파두무타라 부처님께 공양 올리기 위해 아름답게 기른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 팔기도 했고, 비파시 부처님 재세시에는 비구니 대강사로서 수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느 전생엔가는 외아들이 독사에 물려 죽었는데도 "내가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한다 한들 무엇이 이로우랴. 그 아이는 제가 가야만 할 길을 간 것이다"하고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고도 한다. 또 어느 전생엔가는 사리풋타가 국왕이었을 때 그의 왕비로서 십바라밀을 잘 닦았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케마가 석가모니 부처님을 처음 만난 날 눈 깜빡할 사이에 깨달음을 얻게 된 데에는 무수한 전생의 영성적 성장과정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여인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할 만큼 미모를 갖추고 부귀를 누리던 한 왕비가 성자의 길을 걷게 된 데는 그만한 필연이 있었지 않겠는가.
밖으로 밖으로만 향하던 눈을 문득 안으로 돌려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모든 외형적 가치들이 참된 내면적 가치에 비해 얼마나 천박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자신의 몸만을 애지중지하고 바깥 세상만을 바라보던 그 에너지로 이제는 자신의 마음을 소중하게 비추어보는 회광반조(廻光反照)의 인격을 기르게 된다. 타인의 외모와 태도만을 문제삼던 속물적 인간관이 그의 혼과 생명성에 관심 기울이는 수도자적 인간관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오늘날 온갖 영상매체가 여성의 외형적 아름다움을 감각적 기준으로 규격화하여 그 환상(幻相)을 상업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볼 때, 우리 여성들이 케마의 삶을 잘 궁구하여 자기 마음속에 있는 참보배의 소중함에 눈뜨고 고귀한 정신적 향상의 길에 들어섰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