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사의 겨자씨는 어디에 : 키사고타미 ▒
자식과 가축에 애착하는 사람을
죽음은 낚아채간다,
잠든 마을에 큰 홍수가
모든 것을 휩쓸어가듯이.
|법구경·287|
지난 해에는 무려 네 분이나 되는 어른들의 죽음과 만나야만 했다. 죽음이 이렇게 가까운 예삿일인 줄을 전에는 실감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봉분을 다 쌓은 산역꾼들이 황토 묻은 목장갑을 벗으며 담배를 피워 물 때면, 살아남은 사람들은 제각기 삶을 이어가기 위해 이별을 실감하며 산에서 내려온다.
화장장에 가보니 우리의 육신이라는 것이 결국은 도시락 만한 분량의 재로 화하고 마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죽음이라는 현상의 보편성에 대해서 명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죽음을 진정 내 자신의 일로 받아들여 보았는가 하고 반조하게 된다.
"오늘 죽어도 좋은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을 때, 지난 삶을 만족스럽게 여길 수 없는 데서 오는 회한과 아직도 끈질기게 뻗어있는 집착의 뿌리들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종교 사상의 가장 큰 숙제가 아닐 수 없다.
부처님 당시에 사위성에는 고타미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몰락한 가정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이 초췌한데다가 몸도 너무 야위어서, 사람들이 "말라깽이"라는 뜻의 "키사"라는 별명을 앞에 붙여 키사고타미라고 불렀다.
그녀는 집안이 가난한데다 얼굴도 못 생겨서 결혼할 배우자를 만날 수가 없었고 이 때문에 크게 상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돈 많은 장사꾼이 그녀를 보고는 속살림이 예사롭지 않은 여자임을 알아차리고서 가정환경이나 외모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남편을 제외한 시댁 식구들은 그녀를 멸시하며 푸대접했다. 시댁의 이런 적대적인 분위기 때문에도 속이 상했지만, 무엇보다 부모에 대한 효성과 아내에 대한 사랑의 틈바구니에서 속을 태우고 있는 남편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키사고타미가 사내아이를 분만하자 시댁 식구들은 결국 그녀를 집안의 정당한 일원으로서 인정하게 되었다. 그녀는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것처럼 홀가분했고 어둡던 삶이 밝고 행복하게 바뀌었다. 어느 어미가 제 자식을 사랑하지 않으랴만, 키사고타미는 자기에게 결혼의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선사해준 어린 자식에게 정성을 다 바치는 정도를 넘어서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집착하였다.
하지만 그녀가 맛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작스런 병으로 아이가 숨지고 만 것이다. 그녀는 자식을 잃은 슬픔도 견디기 어려웠거니와 앞으로 살아나갈 일이 까마득하기만 했다.
시댁 식구들이 앞으로 얼마나 천대하고 멸시할 것인가, 마을 사람들마저 전생업보가 무거운 여자라며 손가락질할 것이 아닌가, 남편마저도 자기를 등지고 새 여자를 맞아들이려 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먹구름처럼 마음을 뒤덮어오자 그녀는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결코 사실로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아이는 단지 심하게 아플 뿐이며 제대로 된 약만 구할 수 있다면 기필코 회복될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죽은 아이를 팔에 안고서 그녀는 이 집 저 집 이 마을 저 마을 떠돌며 좋은 약이 없겠느냐고 외치며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아이가 이미 숨졌으니 무슨 약을 써도 소용없다고 했으나, 그녀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멸시하며 심지어 우스갯거리 삼아 흉내까지 내면서 놀렸지만, 어떤 인정 많은 사람으로부터 마음의 병을 고쳐줄 지혜롭고도 자비로운 명의(名醫) 한 분을 소개받게 된다. 그녀의 병에 대한 정확한 처방을 제시해 줄 명의는 다름 아닌 부처님이었다.
그녀는 그 사람의 충고에 따라 서둘러 기원정사로 부처님을 찾아갔다. 아이의 시체를 껴안은 채 부처님께 다가가 "이 아이를 살릴 약을 좀 주세요" 하자, 부처님께서는 약이 있긴 한데 몸소 구하려 다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녀는 그 약이 무엇인지만 알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부처님께서 그것은 겨자씨인데 아무도 죽은 적이 없는 집에서 조금만 얻어오면 된다고 하셨다.
그녀는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길을 떠났다. 집집마다 다니며 "겨자씨 좀 얻어갈 수 있나요?"하면 모두들 "그럼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집에서 아무도 죽은 적이 없나요?"하면 "왜 없겠어요?"하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어떤 집에서는 며칠 전에 사람이 죽어 나갔고, 한 달 전이나 일 년 전에 죽은 집도 있고, 어떤 집에서는 아버지가, 다른 집에서는 어머니나 아들 딸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몇 곱절이나 더 많을 거요"하는 말도 새롭게 가슴에 파고들었다.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 되자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사람이 자신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죽음이란 모든 인간의 공통된 운명임을 알게 된 것이다. 어떤 설명으로도 납득할 수 없던 단순한 한 가지 진리를 이 집 저 집 떠돌며 직접 체험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이제 자식의 죽음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숙명이 죽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렇게 시련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참된 행복과 정신적 성숙을 갈망하던 그녀는 어느 날 부처님을 찾아가 비구니가 되기를 간청했다. 부처님께서는 그녀의 발원이 진지하고 굳건한 것임을 아시고 이를 허락하셨다.
비구니가 되어 수행하던 어느 날 밤 명상에 잠겨 있던 중, 등잔불이 타오르며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서 그녀는 한 순간에 아라한과를 이루었다고 한다. 일체만유는 실체시(實體視)할 만한 것이 아니고 항상되지 못한 변화과정에 불과한 것임을 돈오(頓悟)한 것이다.
키사고타미는 자신을 고뇌에서 해방시켜주신 부처님의 자비를 예찬하며 많은 게송을 남겼다. 개인적 비극을 성자의 길로 승화시킨 그녀를 부처님께서는 "착폐납의(着弊衲衣) 제일비구니"라고 칭찬하셨다. 그녀가 내면적 성숙에만 관심을 두고 살았을 뿐 외모에 집착하지 않는 두타행자로서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일생을 살다보면 사람은 누구나 아픔과 시련을 겪게 마련이다. 그 고통을 성숙과 발전의 계기로 삼느냐 좌절과 퇴행의 핑계로 삼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실제로 우리 이웃들의 삶을 둘러보아도 아픔 없이 사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모두들 나름대로의 삶의 무게를 힘겹게 지탱하며 살아가지만, 그 삶 속에서도 영적 성숙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는 사람의 삶은 값지고 아름다워 보이는 반면, 습관성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되어지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아무리 편안해 보여도 본받아지거나 우러러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삶도 언젠가는 끝날 때가 있다는 무상(無常)의 설법을 들려주시고 죽음을 스승 삼아 애써 정진하라는 무언의 경책을 내려주셨던, 지난 해에 떠나신 네 분 어르신의 영가들께서 일체 고혼과 더불어 정토의 안락을 누리시기를 발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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