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故鄕)
고향이란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곳을 말한다. 고향을 떠나와 살다보면 늘 고향이 그립게 마련이다. 우리들 마음속 고향은, 자기의 삶[生]이 시작된 곳, 언제든 돌아가고 싶은 곳, 언제 돌아가도 평온하고 반가운 곳, 끝내 돌아가고 싶은 곳, 죽어서도 묻히고 싶은 곳이다. 그래서 고향 이야기를 하면 대체로 눈시울을 적시곤 한다. 멀리 떠나와 있을수록, 세월이 지날수록 더 그러하다. 고향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우리를 시인(詩人)이게 한다. 고향 이야기가 나오면 누구든, 줄줄이 쏟아내 놓는 추억들, 연신 가슴을 곱게 채색하는 얘깃거리들이 구수하다. 시골에서 태어났거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그렇다. 고향이란 이렇게 우리들의 안심처(安心處)이다.
십 수 년 전의 일이다. 내가 미국 나들이를 처음 갔을 때 뉴욕 어느 한인(韓人) 댁에서의 일이다. 몇몇 한인들이 모여서 친목 모임을 갖는 날이었는데 그 중 한 분이 내가 한국에서 막 왔다니까 유난히 반겼다. 고국(故國)을 떠나 이민 온 지가 어언 30여 년 되었다 한다. 연세는 65세의 부인이었는데, 어쩌다가 미국에 와서 살게는 되었지만 죽을 때에는 반드시 고국에 돌아가 묻히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이시는 것을 보고 얼마나 콧등이 시큰거렸는지 모른다. 나 또한 미국을 처음 가서, 영어도 서툴고 지리도 낯 설어서 며칠 사이에 벌써 모든 것이 익숙한 고국엘 얼른 돌아가고 싶었던 터인지라 내 마음이 투사되어 더욱 그랬을 수 있다. 이렇게 고향은, 우리들의 마음을 가장 안전하게 하는 곳처럼 여겨진다. 간혹 어떤 사람은, 고향에 있으면서도 고향이 그리워 운다는 시(詩)를 쓰기도 한다. 이렇게 고향은 우리의 삶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과정에서 학업이나 취업, 혹은 결혼에 의해 고향을 떠나서 살기 십상이듯, 사람으로 태어나 의식(意識)을 갖고 삶을 전개해 가는 과정에 아무 개념(槪念)도 형성되기 전의 의식인, 순수의식(純粹意識)을 떠나와, 온갖 개념들로 시비분별(是非分別)하며 거미집처럼 복잡한 의식 공간을 만들어 가며 살아가기 십상이다.
3차원 세계에서는 고향을 떠나왔다면 떠나온 줄을 알고, 그리워하며 그리운 줄을 알고, 그리운들 고향을 떠나와 살 수밖에 없음을 수용하며, 간간히 고향으로 돌아가 회포를 풀기도 하지만, 의식의 세계에서는 고향과 같은 순수의식을 떠나와서도, 떠나온 줄도 모르고, 떠나온 줄을 모르니 그리움도 없고, 그리움이 없으니 돌아가고 싶은 간절함도 없는, 실향민(失鄕民)의 생을 살아가고들 있는 것이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삶이다. 모든 것을 다 이루었어도,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한 곳이 비어 있는 듯 허전해 하면서 그 불안과 허전함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한 채 한 생을 살아 마치는 수도 있다. 한번도, 단 한번도, 의식의 고향에 닻을 내려 보지 못한 채, 그렇게 한 생을 살아 마친다. 무수한 사람들이.
의식의 바탕에 닻을 내리고, 그곳이 우리 의식의 고향임을 확연히 알고, 그 고향에 안주함이 얼마나 깊은 평온함임을 아는 사람은, 그냥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깊은 연민과 기도를 가질 것인가 알 듯하다. 나만큼 정도의 체험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이 대목에서 뜨거운 오열이 올라올 정도의 기도가 되니 말이다.
삶이란 의식의 전개과정이라는 정의도 있다. 의식의 전개 과정에서 본바탕이 되는 의식 즉, 아무 시비분별 개념이 시작되기 전의 순수의식 상태가 있다는 사실을 배워서라도 알고, 그 순수의식을 의식하고 있을 때의 무한감(無限感), 지복감(至福感)을 들어서라도 알면, 그것으로서 있어보고 싶은 그리움으로 안달을 하게 되고, 그 맛을 조금이라도 맛보게 되면, 보다 밀도 높은 경지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탕아(蕩兒)의 삶을 살다가도, 그곳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게 되면, 그것을 맛보게 되면, 더 이상 탕아가 아니요 존재감이 지고하게 격상될 것이요, 절대 평온감과 지복감이 무한으로 확장될 것이다. 그리고 그 체험의 깊이를 더해 갈수록, 시비분별의 욕구 에너지는 정화되어 갈 것이다.
고향 없는 자가 없듯이, 의식의 바탕이 없는 자 없다. 마치 그림의 바탕에 도화지가 있듯이, 미역국의 바탕에 물이 있듯이, 온갖 물체의 바탕에 공간이 있듯이, 우리 삶의 바탕에는 원단의식, 순수의식, 자성(自性)이 있다. 그 순수의식이, 맑고 고요히 그 자체로 있지 못하고, 사정없이 빠른 속도로 시비분별하며 온갖 얼룩으로 멍들어 고통 속에 한 생을 살아가고 있으면서,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듯 알고 있음에, 눈 밝은 선지식(善知識)들은 간곡히 호소하고 설득한다. 의식이 어느 것에도 의존(依存)되지 않은 상태로 있어 볼 일을, 일념(一念)의 시비도 허용하지 않는 원단으로 있어볼 일을, 단지 성성이 깨어 있기만 할 일을 말이다. 동사섭 수련의 고급 과정에서는 3박 4일 동안 묵언(黙言)을 하면서, 이것을 주(主)된 주제로 연수한다. 물론 쉽게 얻어지는 결과는 아니겠지만, 끝내 많은 사람들이 감동적으로 체험하곤 한다. 그리고 그 가치를 깨달으면서 시비로 범벅되어 살아왔던 과거를 돌아본다. 단 한 번의 체험일지라도, 아주 적은 깨달음일지라도 귀하고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훈훈한 바람이 스친다. 고향의 봄꽃 소식이 그리워지리. 우리 모두, 고요의 향기, 법열(法悅)의 향기 무한한 그곳, 의식의 고향에 닻을 내려 보자.
2010년 2월 24일
명상의 집 : 대화 합장 (daehwa@dongsasu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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