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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 대한 깨달음>
불교를 보통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불교에 관심 갖기 시작하면서도 그 ‘깨달음’이란 것에 대해 해당 사항 아님이라고 은근히 전제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까닭은 여러 가지였겠지만 우선은 내가 접한 책들이 전하는 바를 보면 나 같은 건 ‘언감생심’ 이었기 때문이었다. 시퍼런 청춘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입산수도하여 평생을 바치는 전문 수행인들에게도 어렵다 하지 않는가. 그런데 속세에서 그저 밥 먹고 아웅다웅 하느라 좋은 세월을 다 보낸 이 철저한 세속인이 나이 마흔 넘어 어찌 감히 그런 욕심을, 이라는 게 내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 깨달음에 눈길이 가지 아니할 수 없어 슬쩍슬쩍 창문 너머 훔쳐보곤 했는데 내가 들추어 보는 책 어디에도 깨달음이 무엇인지 시원한 답이 나와 있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이 ‘해당 사항 아님’이라고 전제하게 된 두 번째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동사섭에서 이런 말씀을 들었다.
“깨달음은 인식의 전환입니다.”
깜짝 놀랐다. 지극한 <그 곳>에 이르는 길이 그냥 인식의 전환이라는 것이다. 그 안내 말씀은 “안경 바꾸면 잘 보여요.” 하는 동네 안경점 아저씨 말과 비슷했다. 아니, 그렇게 간단명료하게, 무언가 비밀스런 분위기라곤 전혀 없이, 이천오백 년 동안 상근기(上根氣)자들 혹은 천재들 사이로만 은밀하게 계보를 이어왔지 싶은 그 일을,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입니다 할 때 쓰는 말과 똑같은 그런 말로 그렇게 훌쩍 말씀하실 수 있는가?
“사물을 보는 관점은 골 백 가지입니다. 그 관점 중에서 어떤 관점을 택하시렵니까? 자기를 불행하게 하는 관점을 취하겠습니까? 아니면 행복하게 해주는 관점을 취하겠습니까? 왜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관점은 내버려 두고 구태여 자기를 불행하게 하는 관점을 택하려 합니까?”
더 이상 반박할 구석이 없었다. 사진 찍기가 떠올랐다. 어떤 피사체든 그것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각도가 있다. 그런데 내가 살아온 나날을 돌아보니 대상을 가장 밉게 보이는 각도로 찍어대며 그것이 밉다고 투덜대면서 그 각도를 바꾸어 볼 생각은 조금도 아니한 것이었다. 그 위에 그 피사체에 아름다운 모습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그 놈은 미운 놈이라고 부득부득 우기고 있었다. 아, 그렇다! 불교의 목적이 이고득낙(離苦得樂)이고 깨달음이 그 이고득낙의 최상승 경지라면 깨달음이란 누가 무어라 해도 인식의 전환, 관점의 전환이었다.
나는 비로소 <깨달음의 꿈>에서 깨어난 느낌이었다. 기뻤다. 육십 년을 세속 한 복판에서 살았어도 각도 전환 작업이라면 해봄직하지 않은가. 나도 타클라마칸 사막을 홀홀 단신으로 건너던 구도자들과 같은 족속에 속하지 않는가 말이다. 내 안에서 스믈스믈 올라오던 그 바람에 대해 ‘자격미달’을 선고하고 그것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어서 기뻤다. 수련장에 모여 앉은 수련생들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이 바쁜 세상에, 다들 밥벌이를 해야 하는데 무언가를 찾아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는 수련생들. 우리 사람은 분명 그 근본이 영적인 존재였다. 그것을 확인하면서 참으로 기뻤다.
동사섭에서의 공부는 그 인식의 전환이 더 깊고, 더 근원적이게 되는 과정이었다. 동사섭은 최종적으로 내 앞에 이런 선택지를 제시하였다. 나와 세상이 있다고 여기면서 이 나를 방어하고 세상을 잡으려고 기를 쓰며 살 것인가. 아니면 나와 세상이 없다는 관점을 취하며 이기심과 잡다한 욕구에서 해방된 삶을 살 것인가. 60 년 동안(아니면 수없는 생애였는지도 모른다) 전자의 관점밖에 모르던 나는 후자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해와 함께 난생 처음으로 평화가, 우주 법계로부터 근원적인 평화가 찾아 왔다. 그 관점을 반복해볼수록 마음속에 해방감이 선명해진다. <나>라는 기준을 세워둔 이상에야 어찌 세상과 다투지 않을 수 있으리. 그러나 그 기준을 치우면, 그 기준이라는 것이 애초에 허구임을 이해하면, 다투려는 에너지가 저절로 잦아든다. 나의 이야기는 나의 관점, 너의 이야기는 너의 관점. 그런 관점에 서니 너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나의 관점을 치우는 일이 점점 가능해진다. 이 존재가 본디대로 점점 평화로워진다. 저 한 그루의 나무처럼….
글. 선혜님(yousori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