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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컬럼

NO1작성일 : 2015-11-12 오후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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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나'는 자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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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lightment

'나'는 자연일 뿐이다

 

나는 오랜 기간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대명제는 진리로 받아들이면서도 내가 죽는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물며 부모 형제가 죽는다는 사실조차 수긍하면서도 ‘나’가 사라진다는 사실은 도저히 수용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마도 몸을 통해 느끼는 인식의 주체를 ‘나’라 여겼기 때문인 듯하다. 의식이 싹 튼 이후 곧장 그렇게 생각해 왔고 그것이 지당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시인 김춘수의 「꽃」을 읽고 난 후부터는 더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얼마나 기막힌 통찰인가. 있다고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인식했을 때에야 상대가 존재함을 안다는 말. 그러니 ‘나’는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 깨달음을 얻은 후로‘나’는 귀한 존재가 되었고 ‘나’는 모든 것을 느끼는 인식의 주체가 되었다. ‘나’로 인해 만물이 의미를 부여 받고 생명을 얻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그렇게 생각했고 그것을 무엇보다 귀하게 여겨왔다. 즉 세상의 중심에는 ‘나’가 있다 여겼기에 족히 그리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나’라는 존재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바깥 세상을 인지하고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나’는 무엇일까? ‘나’는 어디서 왔고 왜 살며 왜 죽어가는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수시로 자문하곤 했던 화두였다.

용타 큰스님께서도 죽음에 대해 오래 사유하셨다 했다. 아니 부처님께서도 보리수 아래에서 죽음에 대해 오래 사유하셨다 했다. 왜 인간은 태어나며 고통을 겪다 죽어 가는가. 죽음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지난 정기강좌에서 용타 큰스님께서는 부처님의 ‘보리수하 각성’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때 동질감을 느껴 반가움조차 들었다. 부처님께서도 인간이 왜 죽는지에 대해 그렇게 장기간 고통스럽게 사유하셨다는 사실은 나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생로병사의 네 가지 고통의 상황을 목격하시고 출가를 결심하셨다. 그러다 부다가야 근처에 있는 우루베라 마을의 보리수 밑에 풀을 깔고 법좌를 정하고서 결가부좌하고 깨닫지 못하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여 수행을 계속하신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는 데는 용타 큰스님의 『공(空)』에 힘입은 바 크다. 용타 큰스님께서는 「‘공’을 깨닫는 27가지 길」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공’하다 말씀하고 계신다. 그 중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항상함이 없이 순간순간 변하므로 공하’니 나라고 할 것이 없다 하신 「무상고공」이나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탄생했다가 머물렀다가 한동안 변화를 반복하다가 사라져 버리므로 공하다’ 하시면서 ‘오늘의 내가 내일도 존재한다고 전제하면 ’나‘라는 실체가 있게 되고 ’나‘에 집착하는 마음이 발달하게 된다’며 「생명고공」에서 경계하고 계신다. 나는 오랜 기간 그렇게 생각해 왔다. 과거가 있었으니 현재가 있는 것이고 현재가 있으니 당연히 미래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한 생각 달리하면 그 의미는 확연히 달라진다. 즉 ‘'과거' 의 존재는 이미 사라져버렸으니 없고'미래' 의 존재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없으며 '현재'의 존재는 찰라 사이에 변하여 사라져 버리니 없다.’고 하신 「불가득공」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러한 용타 큰스님의 말씀에서 나는 죽음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나, 나’하지만 실상 그것을 진정으로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말씀이셨다.

죽음을 알려면 우선 ‘나’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야 한다. ‘나’는 부모님의 정자와 난자에서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것이 ‘나’인가? 아니다. ‘나’를 키운 곡식과 채소들이 ‘나’인가? 그것도 아니다. ‘나’를 인식하게 해준 학문들이 ‘나’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없다. 없는 ‘나’를 자꾸 있는 것으로 착각하니 고통이 따르는 것 아니겠는가. 진정으로 ‘나’라 할 것이 없다는 말씀이다.

‘공’을 통해 ‘나’를 인지하는 가장 명확한 예시는 「분석고공」에서 살펴볼 수 있다. 큰스님께서는 ‘존재하는 것은 여러 부분이 모아져서 존재하는 법이‘라 하셨다. 즉 부분이 모여 전체를 이룬다는 말씀이다. 그러니 부분으로 나누어서 실체를 응시한다면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신다. 대개의 불행은 전체를 '나'라고 실체 시 하여 집착함으로써 빚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체로 보지 말고 부분으로 보면 실체 시할 것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예시로 적당한 것이 다음과 같다. ‘지(地)가 나인가? 아니다. 그것은 지(地)일 뿐 '나'가 아니다. 수(水)가 나인가? 아니다. 그것은 수(水)일 뿐'나'가 아니다. 화(火)가 나인가? 아니다. 그것은 화(火)일 뿐 '나'가 아니다. 풍(風)이 나인가? 아니다. 그것은 풍(風)일 뿐 '나'가 아니다. 수(受)가 나인가? 아니다. 그것은 수(受)일 뿐 '나'가 아니다.상(想)이 나인가? 아니다 그것은 상(想)일 뿐 '나'가 아니다. 행(行)이 나인가? 아니다. 그것은 행(行)일 뿐 '나'가 아니다. 식(識)이 나인가? 아니다. 그것은 식(識)일 뿐 '나'가 아니다.’

이렇듯 원래 공한 것이 몸이다. 그런 몸이 사라진다 하여 절망할 필요 없다.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는 말씀이다. 모든 것은 자연에서 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진리를 다시 확인하게 되면 아쉬울 것이 없어진 셈이다. 부처님께서는 제행무상, 제법무아라 하셨다.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고 변하지 않은 자아란 없다 하신 것이다. ‘나’로부터 벗어나 원래의 ‘나’를 인식하는 것은 해탈의 길로 가는 이정표가 아닐까.

글. 한뜻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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