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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으로 규정하면서 보는 것이 더 제대로 일까. 개념으로 규정하지 않고 보는 것이 더 제대로일까? 물론 개념으로 규정하지 않고 보는 세상이 더 제대로일 것임은 당연하다. 지금 바로 인위(人爲)의 개념놀음이 없는 상태로 바라보라.
실상(實相)은 이언(離言)이다. 개념은 실상을 죽인다. 실상은 개념으로, 언어로 묶을 수 없는 것이다. 실상은 언어를 넘어서 있다. 그러니까 사유(思惟)라는 방편으로 “실상은 언어로, 사유로 묶을 수 없는 것” 이라는데까지 밀고 들어가는 것이다. 사유로 거기까지 갔을 때 딱 느낌이 온다. 그 느낌이 무엇인가? 무한감, 해탈감이다. 그러나 사유로 갈 때까지 가야 한다. 갔다 하면 마지막에 무위법까지 포착하는 순간이 온다. 거기까지가 사유의 전부이다. 그 다음부터는 사유의 영역이 아니고 느낌의 영역이다. 그 때 열린감, 해방감, 니르바나감이 온다. 바로 여기가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영역이다.
언어도단이라 하니까 사다리 자체까지 언어로 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참 답답한 일이다. 선종(禪宗) 책을 보면 사유를 하지 말아라, 문자를 쓰지 말아라 하면서 무슨 책이 그다지 많은가 모른다. 선종에서는 말로 마구마구 써놓고는 언어도단이라 한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언어도단이라는 말은 사다리가 언어도단이라는 말이 아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은 깨끗한 언어로 올라가는 것이고 사다리 극점에 올라가면 딱 비로봉이 보인다. 이 부분부터는 더 이상 언어의 영역이 아니다. 여기부터는 직관하는 느낌의 영역이다. 이 영역까지 언어로 어쩌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사유를 통해서 사다리 극점까지 올라가 보아라.
- 용타 큰스님, 5기 지도자 과정, 제 7강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