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상컬럼

NO1작성일 : 2015-11-11 오후 07:43
제목
2. 잊혀진 성모상을 찾아서
작성자
관리자
파일
▒ 잊혀진 성모상을 찾아서 : 마하마야 ▒
무상관(無常觀)을 닦아 일구어가면
모든 욕망이 뿌리뽑히고
모든 무지가 뿌리뽑히며
모든 자만심이 사라지노라.
「장로니게·716」"석가족의 성자, 붓다, 여기서 탄생하셨도다.
(hida budhe jate Sakyamuni)"
 
 

이것은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지 316년 후에 인도의 아소카 황제[阿育王]가 히말라야 영봉이 바라다보이는 룸비니 동산의 거대한 석주(石柱)에 새겨놓은 93자의 아소카 문자중 한 구절을 풀이한 글이다. 서기 7세기 중엽에 룸비니에 다녀왔던 중국의 구법승 현장법사는 이 석주를 직접 살펴보고서 "이미 벼락으로 부러져 있었지만 새겨진 글은 어제 깎은 듯 생생하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하나의 전설 쯤으로 여겨지며 전해 내려오던, 인류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의 탄생설화인 룸비니의 이야기는 마침내 1896년 고고학자 커닝엄(Cunningham)에 의해 그 유적이 발굴됨으로써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확인이 된 셈이다. 더구나 부처님의 위대함을 흠모하여 일컫는 "붓다 사캬무니(불타 석가모니)"라는 칭호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우리들은 흔히 세속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할 때에도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 알고보면 이 점은 성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고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예수님의 생모(生母)인 마리아의 덕성을 생각해보아도 수긍이 되는 말이며, 존경할 만한 인물은 존경할 만한 어머니에게서 양육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룸비니에서의 부처님의 탄생을 묘사한 경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뚜렷한 성모상(聖母像)이 연상되지 않아 아쉬움을 많이 느끼게 된다. 성현들의 탄생설화가 후대의 선지식에 의해 좋은 의도로 윤색되어 다소간 신비화된 채 전해 내려온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인간 석가모니를 낳아준 마하마야 부인의 정체성(正體性)은 맹모(孟母)나 성모 마리아만큼 뚜렷하지는 못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런 사정에는 마야 부인이 부처님을 출산한 뒤 이레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큰 원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경전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여 정체성있는 성모상을 유추해낼 수 없다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신비적 분위기로 그려져 있는 경전의 구절 속에서도 마야 부인의 구체적인 덕성을 두루 발견해내어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해보는 작업은 가능하고도 필요한 일이리라. 우리는 아소카 황제가 세운 석주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지혜의 눈으로 마야 부인의 성스러운 덕성도 읽을 줄 알아야 될 것이다. 여성 불제자들의 삶을 다루는 이 연재물에 불모(佛母)에 대한 사색을 덧붙여보는 것도 그런 뜻에서이다.

대승불교의 시조로 일컬어지며 「대승기신론」의 저자이기도 한 아슈바고샤[馬鳴尊者]는 마야 부인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왕비는 인드라 제석천의 아내 샤치 만큼이나 수려했고, 그 마음이 아름답기가 길상여신(吉祥女神)인 파드마 같았고, 인내심은 대지와 같이 강했다. 그녀는 참으로 유례없는 신비력을 갖고 있었으며 사람의 마음을 혹하는 마야[幻]처럼 보였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서도 부인의 용모와 인품이 얼마나 뛰어났고 그 마음이 얼마나 향기로웠을까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부처님을 잉태한 후 마야 부인은 사바세계의 음식을 들지 않고 천신이 날라온 음식만을 섭취하며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육바라밀을 예전보다 더욱 잘 수행했다고 한다. 요즘 흔히 쓰는 말로 태교, 즉 성자를 낳기 위한 최상의 태내교육이 이루어진 셈이라고나 할까. 부인은 회태 중에도 아픈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어 쓰다듬어 병을 낫게 할 정도로 선량하고 영험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항상 모든 일에 성실하고 남편과 잘 협조했으며, 계율을 잘 지키고 질투심이 없어서 늘 청정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부인의 머리는 검은 빛이 흘렀고 젊어서 임신한 경험이 없는 정결한 여인이어서, 도솔천의 선혜보살이 보기에도 자기가 빌어야 할 모태로 선정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최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천녀들은 보살의 어머니 되실 분이 누구일까 하고 지상에 내려와서 마야 왕비를 보고는 그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에 감탄했다는 것이다.

태자가 탄생한 뒤 이레만에 왕비는 이승을 떠나 성자를 출산한 공덕으로 도리천에 왕생한다. 부왕은 어머니를 잃은 태자를 왕비의 친동생인 마하파자파티에게 맡기게 된다. 그 뒤에도 태자는 부러울 것이 없는 환경에서 성장했겠지만, 생모를 잃은 무상함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철리가 되어 잠재의식 속으로나마 스며들지 않았을까. 어떤 이들은 마야 왕비의 죽음을 두고 부처님께서 맛보신 최초의 좌절이라고 말하는데, 아직 영아라 해도 그 충격이 일생에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는 말이다. 어쨌든 마야 왕비는 부처님의 인격 형성에 태내적으로 깊은 영향을 심어주었을 것은 물론이고, 출생 후에도 짧지만 강렬한 본질적 체험을 안겨준 셈이다.

모든 불교사의 첫 부분을 보면 간결하게나마 왕비와 태자 사이의 관계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유명을 달리한 어머니의 존재가 아들의 마음에 얼마나 비중있게 각인되었는가를 보여준다. 또한 가장 숭고한 형태의 모자(母子)의 정을 드러내준다. 부처님께서 6년 동안의 설산고행을 하다가 몸이 극히 쇠약해졌을 때, 마야 부인이 근심이 되어 천상에서 내려와 아직 생명력이 남아있음을 보고 안심했다고 한다. 또 부처님께서는 성도하신 후에 신통력으로 천상에 올라가 생모를 위해 설법했다고 하며, 부처님께서 대반열반에 드셨을 때에는 마야 부인도 천상에서 내려와 슬퍼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후대의 경전 성립기에 이루어진 윤색일 수 있겠으나 상식에 크게 어긋나는 것만은 아니다. 불교사에서 마야 부인이 언급되는 비중을 생각해 보면, 도리어 다른 종교의 성모상에 비해서는 훨씬 과장되지 않은 모습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점 또한 부인의 단명(短命)함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위대한 인물을 숭앙하는 마음에 뒤따라서 그분을 있게 한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조선 후기의 훌륭한 선승인 진묵(震默) 대사에 대해 존경심이 우러난 나머지, 그 스님을 잉태하여 수행자가 되게 해준 어머니를 "성모"라 칭하며 존경의 뜻을 표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반드시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서가 아니라 훌륭한 모성(母性)을 잊지 않고 찾아 기린다는 의미일 것이다. 마야 부인을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우리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의 태내적 인격을 성숙시켜주신 그분의 덕성을 잊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성모상은 다름 아닌 육바라밀의 화신이요 선량하고 청정한 마음의 표상이 아닐까. 그래서 현세만을 생각하고 내 가족만을 생각하는 요즘의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풍조가 병든 것임을 알아차리고 있는 우리 여성 불자들에게 두고두고 되새겨볼 만한 화두가 되지 않을까.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