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 무엇인가?
<나>에 대한 보다 유익한 개념화가 요청된다. <나>는 삶의 모든 행위의 주체로서, 모든 행위의 목적 또한 <나>의 행복을 위함이기 때문이다.
행복 추구의 주체도 <나>요, 작선(作善) 화합(和合) 수심(修心)은 물론 대원(大願)의 발원 또한 <나>가 한다. 이처럼 <나>란 인생의 핵심적 의미이다. 그 <나>가 정작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 정리를, <선명히, 그리고 잘> 할 필요가 있다.
백 사람이 있어, <나는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각기 다른 답이 나올 수 있다. 다른 뿐만이 아니라 그 수준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나>에 대한 생각 체계 즉 <나>에 대한 정체성(正體性)이 애매한 사람은 애매한 인생을 산다. 선명하고 수준 높은 정체성이 있는 사람은 뚜렷하고 질높은 인생을 산다. 가치관 가운데 가장 으뜸이요 중요한 것은 역시 자아정체관일 것이다.
다양한 자아관 중에서 가장 바람직하지 않는 자아관은 부정적 자아관이다. 즉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나는 나쁘다.’ ‘나는 할 수 없다.’ 식의 자아관이다. 일단 부정적인 자아관이 익어진 사람은 일을 행함에 있어서도 자신감이 떨어지고 생기와 활기가 부족하므로 일의 성취도도 낮을 것이다.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에는 열등감이라는 병리적 심리를 드러내기도 한다. 만 가지 불행의 모태가 이 부정적 자아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태도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정신장애라고 일컬을 수도 있다. 신체의 장애로 인한 불균형의 고통처럼 정신적 불균형의 고통을 겪게 된다. 고로 일단 부정적 자아관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는 자아관으로 권장해봄직한 것에 지족자아관(知足自我觀)이 있다. 지족자아관(知足自我觀)이란 스스로에게서 이미 있고 이미 이룬(旣存旣成) 부분을 확인함으로써 <나는 이대로 만족할 만한 사람이다.>라는 사고체계의 자아관이다. 자기 자신을 명상하여 <그것의 없음에 비하여 있음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하고 생각하며, 그것을 이루지 못한 것에 비하여 현재 이루어져 있음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하고 생각하는 것이 자아에 대한 지족명상이다.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것이 그 눈의 없음에 비하여 얼마나 다행한 일이며, 구구단을 욀 수 없음에 비하여 욀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하고 백 가지이고 천 가지이고 찾아서 명상해 보는 것이다. 자아에 대한 지족명상을 충분히 함으로써 무의식에서까지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 젖어들 정도로 지족자아관을 튼튼히 해둔다면 일단 행복이 보장될 것이요, 해탈의 기초다짐이 될 것이요, 무슨 일이나 적극적으로 흥미를 가지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여길 때에는 우선 기쁘고, 그 기쁨은 삶에 생기와 활기를 가져다주므로 무슨 일이든 성취도도 높아갈 것이 틀림없다.
지족 자아관은 부정적 자아관에 비하면 흙덩이에 비한 옥의 차이이겠지만 끝내는 세간적인 자아관이다. 세간적인 자아[나]는 아직 자신을 실체시 하는 관이다. 부정적자아관이든 지족자아관이든 자아를 실체시하는 관점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자아를 실체시하는 자아관은 속제자아관<(俗諦自我觀):부정 자아관이든 지족 자아관이든>으로 시비분별의 상대성 위에 있기 때문에 다시 고(苦)에 떨어질 불안정성이다. 단 지족자아관을 거듭 밀고 나아가면 초월자아관 내지는 묘유자아관으로 통하여 나아가지만 지족 자아관의 일반적인 의미는 속제자아관이다. 고로 지족자아관에 이어 다음 단계의 자아관이 요청된다. 보다 안정성의 자아관으로서 초월 자아관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정신활동을 하게 된다. 의식의 주체 기능이 의식의 객체를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고 결단하는 과정이 정신활동이다. 이 정신활동 과정에서 의식의 주체 기능 쪽을 <나>라고 생각하고, 그 <나>가 시간적으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를 동일시(同一視)하고, 그 <나>를 중시여기는 이기심(利己心)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이것이 자아(自我)의 형성과정이다. 자아(실아)의 사전적인 의미는 상(常), 일(一), 주(主), 재(宰)이다. 이 상일주재(常一主宰)의 자아의식은 반복사고와 반복표현을 통해서 강화되고 비대해진다. 사람의 일상사 생활은 깨어 있지 않는 한, 그 ‘나’ ‘나’ ‘나’ 하는 생각과 표현의 반복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자아의 강화와 비대는 세월에 비례해서 심각해진다. 그 결과 갖은 고통, 불행, 재난, 갈등, 전쟁이 현실로 다가온다. 속제자아관에 머물러 있는 한(限), 늙음이나 병이나 죽음에 의해 좌절 될 수밖에 없고, 관계 차원에서는 이해관계로 상충되는 긴장과 갈등과 싸움과 전쟁이 불가피하다. 늙음, 병, 죽음과 같은 인간의 절대 한계상황 앞에서 당당하고 초연할 수 있을 때 그 자아는 안전과 영원성을 확보 받는다. 안전과 영원성을 확보 받지 못한 자아는 난로 위에 놓인 어름 조각물과 같이 위태롭다. 그래서 자아 문제는 현실적으로든 영성적으로든 심도 있게 다루어져야 한다. 곧, 자아에 대한 이해체계를 바로 하는 것은 구원의 길이기도 하다. 고로 부정적인 자아관에서 지족자아관으로 전환되어진 정도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보다 철저한 철학적, 혹은 도학적 작업을 통해 자아에 대한 수준 높은 관점을 세움으로써 저차원의 자아관에 의해 빚어지는 내외의 재난을 막아야 한다. 그 대안 하나가 초월 자아관이다.
해공십조 중 어느 관점으로 관조해 봐도 막연하게 <나><나>하던 것이 얼마나 엉뚱한 일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예컨대, 분석고공(分析故空)으로만 자아를 관조해도, 사대(四大)나 오온(五蘊)을 <나>라 할 수 없다. 즉, 지(地)를 <나>라 할 사람 없고, 수(水)를 <나>라 할 수 없고,....내지...식(識)을 <나>라 할 사람 없다.
합리적이지 못하고 애매하게 가지고 있는 실체적 자아를 합리적으로 관조하여 속제자아관을 무너뜨린 다음의 자아관을 <초월자아관: 超越自我觀)>이라 이름하면 될 것이다.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진제자아관(眞諦이다.
초월자아관을 통해 속제(俗諦)적인 자아가 파(坡)해지면 자연히 모든 것이 <묘유(妙有)로 드러난다. 이 묘유적 자아의 사고 체계를 묘유자아관(妙有 自我觀)이라 하자. 묘유적인 자아는 무수히 그리고 복합적으로 드러나겠지만 세 가지로 정리해 본다. 우선 자아에서 초월됨으로 해서 오는 자유감, 해탈감이 그 하나요, 자아가 사라지니 전체가 한 나, 한 생명으로 관조됨이 그 하나요, 주변에 고통 받는 존재들을 돕는 과정이 그 하나이다. 지족자아관에 의해 훈훈해진 의식 분위기 위에 실체적인 자아의식이 사라져 온 우주가 온통 돈망의 대자유와 대자비로 넘실거리고 인연 따라 입전수수(入廛垂手)함이라! 가히 그러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지족자아관 (知自我觀)), 초월자아관(超越自我觀), 묘유자아관(妙有自我觀)의 단계로 자아에 대한 분명한 이해 체계를 갖는다면, <나>에 대한 가장 유익한 개념화가 될 것이라 믿는다. <나>에 대한 선명하고 질높은 관으로 이 세상 모두의 행복이 보다 높아질 것을 기원한다.
2003년 7월 1일 용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