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수도의 삼각대(三脚臺)
- 해탈과 자비와 일의 완성 -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 평생 살아가노라면 깊게 생각해봄직한 많은 주제들이 있다. 그 중 몇 개의 주제들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격물치지(格物致知)하여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지침으로 삼고들 있다. 나에게도 내 삶을 안내해 가는 몇 개의 지침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삶의 모든 상황에 즉(卽)하여 추구해갈 방향으로 자리매김해 놓은, 나의 생활속에서의 수도 목표이기도한 삼각대가 있다. 해탈과 자비와 일의 완성이다.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는 늘 해결해가야 하는 일들이 있다. 또한 어떤 일을 해 감에 있어서 사람이 더불어 있게 마련이다. 이때 그 일이 잘 되게 해가는 일이 하나의 과제요 목표이려니와, 더불어 있는 사람을 소외시키지 않고 존중하며 섬기는 일이 또 하나의 과제이자 목표요, 일의 주체가 되는 각인의 마음이 ‘일’이나 ‘사람’ 으로 인하여 평온이 깨지지 않도록 즉, 일과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 또 다른 하나의 중대한 과제로 삼음 직하다. 다시 말해 여하한 경우에라도 그 경계(境界)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요, 사람과 연관된 상황이라면 자비의 인격을 길러가도록 깨어있을 것이요, 나아가서 그 일의 성취를 위한 노력에 최선을 다할 일이다.
우리가 자칫 과업 성취에 급급하다 보면 스스로 마음의 평정을 잃을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소위 과업지향적인 삶이다. 우리네 삶속에서 더러 경험하는 일이다. 자녀교육의 한 예(例)를 들어보아도 좋다. 전자오락 게임을 즐기며 학과공부를 소홀히 하면서 학교성적이 떨어지고 있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입장에서 우리가 지향해 가봄직한 과제라면, 우선 그 아이가 학과공부에 재미를 붙여가고 학교성적도 높아져가도록 잘 안내해야 할 일이 들려질 것이다. 이때 해결해 가야할 일을 너무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스스로 마음이 상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녀에 대한 자애로움이 소홀하지는 않는지 살펴볼 일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마음이 상해 있거나 자녀에 대한 자애로움이 굳어 있을 경우 일의 성취도 자연히 비능률적이기 쉽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의 성취보다도 더 우선적으로 이루어봄직한 가치가 평온과 자비일 수도 있다. 일체의 경우 화가 나는 근본적 이유는 사실 경계 탓이 아니라 그 경계에 대한 자신의 욕심 때문이라는 것, 우리의 마음은 본래 모든 경계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상식이 되어 있을 정도로 다 알고 있는 원리이고, 우리의 자녀가 아무리 생활습관이 어긋나있고 학교성적이 떨어진다손 그것이 우리에게 존중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할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는 가정에서만 아니라 직장에서나 또 다른 어떤 조직에서도, 사람이 모여 사는 모든 곳에서 참으로 중대한 삶의 과제로 여겨진다.
그래서 종교를 비롯한 모든 정신문화에서 해탈과 자비의 덕성을 커다란 기치로 내걸고 인류가 구현해갈 수행운동으로 펴고 있다. 동사섭문화에서도 이 두 가지 덕성을 매우 귀하게 여기며, 일[所任] 또한 공동체 행복의 중요조건이므로 수심 • 화합 • 작선 이 세 덕목을 정체 • 대원과 아울러 <삶의 5대 원리>의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해탈과 자비와 일의 완성이 한 개인과 소속공동체의 행복에 매우 중대한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완벽한 인격을 살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부단히 노력해 갈 일이로되, 그 과정에서 몇 가지에 대하여 깨어있을 필요가 있다. <일>에만 매달려 해탈과 자비의 가치를 간과하고 있지는 않는지, <해탈>에 너무 치중하다가 사람과 일에 무관심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비>를 노래하며 일의 무능력과 무성과를 방치한 나머지 개인과 소속공동체의 불이익을 초래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이다.
이 세 가지 덕목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상황 상황에 무엇을 더 우선적으로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개인차가 있을 것이다. 그 개인의 가치관이나 기질이나 혹은 필요에 따를 것이라 본다. 잘 깨어있게 되면 그 순간에 스스로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를 알 것이다. 무관심에 떨어지지 않으면서 해탈을 선택할 수도 있고, 스스로 해탈도 챙기고 일의 절차와 성과에 깨어있으면서 자비를 선택하여 살 수도 있고, 안으로 해탈과 자비를 추구해가면서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도 있다면 최상의 노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해탈도 부족하고 일의 성취도도 낮지만 자비를 선택할 수도 있고, 일에 선택적으로 무관심하면서라도 해탈 인격을 익혀갈 수도 있고, 안으로 해탈과 자비의 인격은 낮지만 일의 차원에서 풀어가야 할 일임을 자각하고 일에 치중할 수도 있다. 다만 우리가 지향해봄직한 가치의 방향을 잃지 않기를, 스스로 정직한 자기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자신과 소속공동체의 보다 안정된 행복을 위하여.
이렇게 나름의 분명한 지침이 되어주는 가치관이 있다는 것이 매우 유익하고 편안하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더러 미성숙한 역할이 되었을지라도, 그 가치관에 따라 삶의 방향을 추스르게 되니 말이다. 생활 수도의 점검(點檢) 기준이 되는 이 삼각대(三脚臺), 해탈과 자비와 일의 완성을 위한 끝없는 정진을 해 가리라 다시 서원한다.
2004년 겨울 문턱에서
명상의 집 ; 대화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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