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살 길
- 지족(知足)과 방하(放下) -
흔히 하루를 마감하면서 일기(日記)를 쓴다. 그리고 한 생(生)을 마무리하면서 유서(遺書)나 유고집(遺稿集)을 낸다. 하루를 마감할 때에는 내일이 있을 것이라는 습관적인 미욱한 희망으로 마음이 철없이 여유롭다. 병고(病苦)나 노고(老苦) 중에 생의 마감을 준비하는 마음은 차분히 절박할 것이다. 내일을 보장받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조급하고 애가 터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생명을 더 유예 받고 싶은 욕심에서이다. 사실은 하루를 마감하는 일이나 한 생을 마감하는 일은 엄정하게 같은 의미이다. 내일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나아가서 찰나찰나 우리는 생의 마지막을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면 맞다. ‘지금’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일 뿐이다. 지금 바로 최선을 다할 일,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소임이다. 지금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지금 바로 최선을 다한다할 때에 무엇에 대하여서인가?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서이다. 최선으로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의 목적은 행복이다, 행복! ‘지금’밖에 기회가 없는 우리들로서 지금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 행복할 줄 아는 자는 ‘미래의 지금’에도 행복해질 수 있음이 틀림없다. 미래의 행복을 꿈꾸며 지금 행복할 줄 모르는 사람은, 미래의 지금이 주어진다 해도 다시 미래의 행복을 기획하며 고단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지금 바로 행복할 일, 그것이 우리가 모든 순간에 최선으로 할 일이다. 지금 바로 행복하자고할 때에 어떻게 행복해질 것인가? 지족(知足)과 방하(放下)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살 길은 지족과 방하이다.
인생은 무엇인가를 끝없이 욕구하고, 욕구 성취를 위하여 애쓰다가 가는 길이다. 성취가 되면 기뻐하고 좌절되면 괴로워하면서, 그 가운데 이런저런 미담(美談)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마음이 괴로워 병(病)을 치루기도 하면서 한 생을 살아간다. 우리가 욕구하는 것들을 다 성취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을 행복이게 할 수는 있다. 인류의 모든 스승들께서 안내하는 가르침들의 핵심이 곧 그것이요, 삶의 문제를 지고하게 달관한 지성인의 삶의 기초 원리가 그것인 것 같다. 지족에 눈을 뜰 일이요, 방하의 원리를 깨달을 일이다.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수많은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할 일이요, 이 모든 것들의 허상(虛像)을 바로 알고 집착을 놓을 일이다. 우리가 조금만 눈을 뜨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가 참으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미 있는 것, 이미 이룬 것만으로도 찬란한 우리 인생임을 알게 된다. 나아가 모든 욕구의 근원을 더듬어가다 보면 단지 살아만 있는 의식의 본자리에 이르게 되며, 그곳은 욕구는커녕 호리의 한 생각도 일어나기 이전의 곳으로 정적(靜寂)과 고요한 법열(法悅)만이 흐르고 있는 곳[處]임을 알게 된다.
지족에 눈을 뜨게 하는 비결 하나로 <만약 그것이 내게 없다면?>, <만약 그보다 못하다면?>을 참으로 진지하게 사색해 보는 일이다. 만약 내가 볼 수 없다면? 만약 내가 말을 할 수 없다면? 만약 내가 들을 수 없다면? 내가 만약 걸을 수 없다면? 내가 만약에 생각할 수 없다면? 내가 만약에 느낄 수 없다면? 내가 만약 문자를 모른다면? 만약에 내가 사랑할 줄을 모른다면? 내게 만약 간장(肝腸)이 없다면? 내게 만약 심장이 없다면? 내게 만약 신장이 둘 다 없다면? 내가 만약 배설의 기능을 할 수가 없다면? 만약에 내가 숨 쉬가 곤란하다면? 만약에 내가................?
이 모두 극히 힘겨운 일이다. 이 모든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면 그 수고로움과 경제적 투자는 참으로 아득한 일이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이미 있는 그것>을 찾아서 횡재로 여길 일이요, <그보다 못한 데 비한다면야>하며 천만다행으로 여길 일이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요, 그것이 복된 생각이기 때문이요, 그것만이 오직 살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순간순간의 행복여탈권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스로 그때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우리는 무수한 체험으로 안다. 그 때 내가 그것을 선택하여 기뻐하였고, 그 때 내가 그것을 선택하여 괴로워했던 숱한 기억들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지족을 선택할 것인가, 불만족을 선택할 것인가는 그 순간의 자신의 뜻에 달려있다. 지금 행복해지고자 한다면 답은 이미 내려져 있다.
방하에 눈을 뜨게 하는 비결 하나로, 의식의 전개과정에 대한 사유이다. 우리의 의식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이 세상[인식대상]에 접해 가고 있는가를 사유해볼 일이다. 반대로 우리가 접하고 있는 세상과 자신의 의식세계와의 과정을 거슬러서 더듬어 가보노라면, 그 진원지에 의식의 원단(原緞)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의식의 원단인 순수의식에 이르게 되면, 모든 것이 절로 방하가 된다. 잡고 있던 모든 것이 놓여진다. 의식의 원단인 순수의식으로 있고자 하여도 개념화 및 욕구 행위를 해 오던 습관성의 그늘이 고요한 명상을 은근히 방해한다. 그 배후의 업(業)을 대청소하게 하기 위하여, 의식의 전개과정에서 알게 되는 원리의 하나로서 욕심의 근본인 자아(自我)의 비실체성을 관하게 한다. 소위 무아(無我) 명상 혹은 비아(非我) 명상이다.
의식의 전개과정, 의식의 원단 등의 용어는 동사섭 문화에서 쓰는 고유개념으로서 용字 타字 큰스님께서 개발하신 용어들이다. 오랜 세월 모시고 수련을 함께해 온 연유로, 또 그것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공덕으로 자신 속에서 소화된 용어로 빌려 쓴다.
지족에 눈을 뜬다면 우리 인생은 찬란한 기적의 연속이요, 숙연한 신화적 역사이다. 감사와 찬탄의 기쁨이 넘칠 것이다. 방하에 눈을 뜬다면 우리 인생은 그야말로 지족의 극치로서, 이대로 무위(無爲)의 고요한 극락으로, 맑고 평화로운 기쁨으로 조용히 숨만 쉬고 있으면 될 일이다. 知足과 放下는 우리 인생을 어느 순간에도 행복이게 하는 천국열쇠[Master Key]이다. 매 순간 우리는 지족과 방하로서 최선을 다할 일이다. 그리고 그때그때의 과제인 구현목표를 향해 성실히 살아갈 일이다. 동사섭 문화에서는 지족구현(知足具現) 즉, ‘지족 바탕 위에 구현’을 기초 철학으로 하고 있다.
이 글을 쓰며 문득문득 뜨거운 오열이 올라왔다. 새삼 역대 성현들의 지고한 깨달음의 구도열정과 그것을 안내해 주시기 위한 고구정녕한 자비심에 대한 지극한 감사함에서이다. 이 세상 모두가 지족의 풍성한 기쁨으로 넘치며, 방하의 고요한 해탈에 젖어 가시길 빌고 또 빈다.
2005년 7월 19일
명상의 집 ; 대화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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