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懺悔)의 미덕(美德)
참회란 깊게 뉘우친다는 뜻이다. 살아온 세월을 돌이켜보며 스스로의 잘못을 성찰-시인-뉘우침-결의하는 전 과정을 참회라 한다. 다른 단어로는 회개(悔改)라 부르기도 한다. 참회[회개]기도는 하늘마음에 달(達)하는 참으로 성결(聖潔)한 의식(儀式)이라 믿는다.
나이가 들수록 존재계의 엄정한 섭리(攝理) 앞에 경건한 두려움으로 더욱 무릎이 꿇어지며, 참회가 우리 인생에 왜 필요하며 얼마나 필요한지를 더욱 절감한다. 호리(毫釐)의 만심에도 화들짝 놀랠 것을 다지며 진정한 참회의 기도를 이 가을에 바치고 싶다.
인생이란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커다란 한 마당의 극(劇)이다. 관계 속에서 무엇인가를 서로 주고받기하며 다채로운 극을 만들어 간다. 우리가 숱한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꺼리를 주고받는 듯하여도 그 내용을 간추려보면 그저 기쁨을 주고받고, 고통을 주고받는 것으로 정리된다. 기쁨을 주고받는 일이야 다다익선(多多益善)으로 아무리 하여도 지나침이 없겠지만, 고통을 주고받는 일은 우리가 정신 차리고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의 인생이든 그 삶의 목적은 고통을 떠나서 기쁨을 지향해 가는 것이라고 볼 때에, 고통은 무조건 순화시키며 기쁨은 가장 적극적으로 일구어가는 일이 우리 모두의 삶의 절대적 목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의 순화, 기쁨 지향의 구체적 방법으로서는 고통과 기쁨의 조건[원인]이 되는 것들을 개선해 가는 것이 그 전부이리라. 즉 행복조건의 개선이다. 행복조건을 크게 두 분류로 나누어보면 <윤택한 환경>과 <모든 환경을 잘 받아들이는 수심(修心) 체계>로 정리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생명체들의 가장 이상적인 환경을 진심으로 빌어마지 않는다. 아울러 우리 모두가 어떠한 환경이라도 잘 수용하는 수심 인격이 높아져서, 윤택한 환경을 갈구함에만 치우치는 인생이 되지 않도록 간곡히 빈다. 일체 환경을 잘 수용함은 그 자체로 평정심을 가져올 뿐만이 아니라, 윤택한 환경을 부르는 좋은 에너지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일체 환경을 잘 수용하는 수심의 하나로 참회기도가 있다. 자신의 일체 업장(業障)을 참회하는 의식이다. 환경을 탓하여 불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스스로 복(福)이 부족하고 덕(德)이 박(薄)함을 뉘우침이다. 여하한 환경이라도 잘 수용하며 그보다 나은 환경을 지어가고자 노력해 감에 있어서 어쩌면 이보다 더 명쾌한 답안은 없을 수도 있다. 우리의 업장을 제대로 녹이고, 과거청산을 통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할 때에 참회의식은 반드시 통과해야할 필수 관문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인생은 우리가 현재의 이전에 지어 놓은 대로의 삶의 패턴이 꾸준히 때와 장소를 달리하여 재(再) 실행되어 갈 뿐이기 때문이다. 마치 컴퓨터에 한 프로그램을 설치해 놓으면 그대로만 실행되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내뿜은 심신의 파장이 세상[人, 物, 事 등등]에 부딪혀 그만큼의 무게와 색감과 강도로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역사하기 때문이다. 마치 이 산에서 야호하고 지른 소리가 저 산에서 부딪혀 되돌아오는 메아리처럼 말이다. 이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초미의 긴장과 경건한 두려움을 아니 가질 수 없는 것이 삶의 현장이다.
고로 참회기도에 선행하는 좋은 신념으로는 인과율에 대한 순직한 믿음과 선연한 깨달음이다. 인과율은 존재계의 엄정한 섭리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호리의 오차도 없는 중중연기(重重緣起)의 이치로 흘러가고 있다고 볼 때에, 우리 앞에 다가오는 그 어떤 상황이라도 그 원인이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볼 수 없으리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원리가 그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군가로부터 호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면,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다면, 누군가를 이유 없이 덜 우호적으로 느끼고 있다면, 누군가를 적당한 이유를 내걸며 미워하고 있다면, 누군가와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면, 어떤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면, 원치 않는 일이 자꾸 일어나고 있다면,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이때 우리의 할 일은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무조건 참회부터 할 일이다. 참회부터!!!
참회는 마음을 낮게 한다. 참회는 마음을 맑혀준다. 참회는 마음을 밝게 한다. 참회는 마음을 당당하게 한다. 참회는 마음을 활기 있게 한다. 참회는 죄의식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소극적 의미로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삶의 원리에 대한 눈을 열어주는 적극적인 의미를 가져다준다. 참회란 우리 영혼 속의 절대양심과의 소통이다.
또한 참회는, 그 극점에서 니르바나[大解脫)의 이상향으로 통한다. 자신의 과오(過誤)를 되돌아보며 우주양심에 고개 숙이고 가만히 있노라면, 모든 과오의 근본 원인이 어디서 오는지 그 원리가 보인다. 모든 과오는 세상의 빔[我空 法空]을 알지 못하고 아와 법을 실체시한 데서 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무지(無智)를 깨닫고 반성하며, 지혜의 눈으로 세상을 바로 본 즉 온통 텅텅 빈 대 해탈의 우주가 현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높은 수준의 참회법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이참(理懺)이다. 사리분별 차원에서의 참회를 사참(事懺)이라 일컫는 반면에 이치적으로 참회하는 것을 이참(理懺)이라 한다. 정직한 사참과 냉철한 이참을 함께하여야 진실한 참회[眞참회]라 안내한다. 참으로 묘하고도 감사한 이치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얼마만큼 우리 영혼 속의 절대양심에 가 닿을 수 있을 것이며 우리 영혼이 얼마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맑고 평온한 마음을 얼마나 가치 있게 여기는가, 그것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가의 의지에 비례할 것이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서, 내가 기억하는 모든 죄업을 낱낱이 다 고해 바치며 성심껏 참회하옵고, 내 무지의 바닥까지 말끔히 날려 보낼 대오각성(大悟覺性)을 놓치지 않고자 죽을 힘 다하여 바치는 나날이 될 것을 서원한다.
2005년 9월의 끝자락에서
명상의 집 ; 대화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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