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기사님께 배운 인생 공부
- 기사님께서 실천하고 계신 주인의식과 대원정신 -
동사섭수련회에서 안내하는 가치관의 벽두에 임장기초신념(臨場基礎信念)이 있다. 우리는 순간순간 어떤 장(場)에 임하게 되고, 그 장에서 한 마당의 삶을 살게 된다. 이 삶이 행복한 삶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서 장에 임하는 기초적 태도를 정립하는 게 좋다는 의견이고, 그 기초적 태도로서 두 개의 신념을 안내한다. <그곳의 주인이 되어>, <그곳을 천국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직업소임을 담당하시면서, 그리고 생활 속에서, 있는 곳의 주인이 되어 그곳을 천국으로 만들고 있는 한 아름다운 기사님을 만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며칠 전 서울에 볼 일이 있어서 간만에 버스를 탔다. 장수에서 서울까지는 약 4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이다. 앞이 훤히 틔어있어 시원한 전경도 누릴 겸 기사님의 바로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장수는 아직 상당한 시골에 속한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대체로는 본인의 자동차로 움직이는 연고로 명절이나 휴가철의 잠깐 동안을 빼놓고는 대형버스에 승객 겨우 5~10명 정도 태우고 가기가 일쑤라 한다. 어떤 때에는 단 한 분의 승객과 서울을 간 적도 있다고 한다. 오늘 내가 탄 버스에 타신 승객은 열 분이셨다. 올해 환갑을 맞으셨다는 기사님의 이런저런 말씀들이 점잖으면서도 유연한 사고세계를 보여주시고, 심도 있게 유익한 몇 말씀이 곰삭혀봄직하여 그 여운이 오래 갔다. 도처에 삶의 지혜로운 선생님이 계심을 다시 고개 끄덕이며 한결 낮아지고 맑은 마음이 되게 하는 감사한 날이었다.
발차 시간이 되어 모든 승객들이 착석하자 기사님께서 앞에 서서 환히 웃는 얼굴로 정중하고 따뜻하게 인사를 하며 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4시간 정도 동안 생사안녕을 함께하는 계약가족입니다. 여러분들은 제게 최대한의 안전과 편리를 요청할 수 있고, 저는 여러분들을 도착지까지 안전하고 편안하게 모셔야할 소임을 맡은 사람입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시고, 마중 나올 분들께는 10분 정도 전에 나와 계시라고 일러주십시오. 하차 후에는 자칫 서로 찾기에 번거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아울러 신탄진 휴게소에서 약 15분 간 쉬어가겠습니다. 다소의 시간이 더 필요하신 분은 그때 말씀해 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직업적으로 익어져 있는 의례적인 인사말이 아니라 다순 정성이 어려 있고 편안함과 친절함이 담뿍 담긴 이 한 마디 말씀에 나는 벌써 감동하여 가슴이 뭉클, 미소와 합장이 절로 나왔다. ‘아, 이분은 임장기초신념을 살고 계신 분이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하시는 곳에서 주인이 되어, 함께 임하는 모든 분들의 행복을 위해 온전히 존재하는 분 같았다. 기사님의 인사와 안내 말씀이 끝나고 발차한 후에 나는 기사님 뒷자리에서 몇 차례고 대원기도를 올리며 답례를 하였다.
그 밖에도 기사님께서는 뒤에 앉은 내가 일반인이 아니라 불교수행자의 행상을 하고 있으니 각별한 생각이 들었던지 이런저런 말씀도 건네셨다. 운전에 지장가지 않을 정도로 유념하면서 기사님께서 하시는 말씀들에 나도 슬쩍슬쩍 훈수를 들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휴일엔 주로 동네 경로당엘 가신다는 이야기, 경로당에 가시면 아직 노인층도 아니어서 어중간한 입장이라는 것, 그런다고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로는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효율이 별로라는 말씀, 경로당에서 어른들과 어울릴 때에는 몇 가지의 준칙을 갖는다는 점, 그 하나가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에 이기려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 지더라도 계속적으로 져서는 싱거워하시니 안 된다는 것, 가끔 이기기도 해야 하는데 이길 때에는 아주 적은 점수로 이겨야 도전적 에너지를 강화하여 흥이 나시도록 해 드릴 수 있다는 것, 그런 노력들이 재밌고 보람이 느껴진다는 이야기, 이만 원에서 이만 오천 원 만 하면 막걸리 한 통 대접하고 다소의 과자부스러기를 안주로 내어 푸짐한 하루 간식거리가 되어준다는 것, 어디에 가서 하루에 그만한 돈으로 그 만큼 즐겁고 의미 있고 따뜻한 하루가 되겠냐는 등등의 이야기이다. 말씀 하나하나에 삶의 지혜와 사람에 대한 정감이 인격의 향기로 묻어나온다. 경로당에 가셔서도 그곳의 주인이 되어, 그곳의 행복을 두루 살피시며 행복해 하시는 생활의 한 단면이다. 그에 덧붙여, 장수 등의 시골 읍에서 서울로 가는 걸음에는 거의 빈차로 가다시피 하여도 서운하거나 허전해 하지 않다는 것, 단 한분의 승객이라도 기꺼이 최고의 서비스로 모시고자 하는 정신을 갖는다는 말씀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며 울렸다. “아, 이 분은 시외버스 기사님으로서의 프로이시구나!” 가슴이 시큰거리며 탁 트이는 시원함이 느껴졌다. 수련 안내와 강의를 주 업으로 하고 있는 나에게, 마라톤 상담을 하다보면 사람에게 지치고 기단해질 수도 있는 나에게 큰 교훈의 말씀이셨다. 단 한 사람의 수강생이 오더라도, 아무리 힘든 내담자에게라도 더욱 최대한의 정성과 자비로서 임하여야 함을 거듭 새기게 하는 말씀이셨다.
차 안에서 잠도 좀 자고, 바깥 경치도 한가롭게 좀 둘러보고, 게으르게 명상도 하면서 편안한 여행길을 만들 요량으로 버스 편을 택하였는데, 원했던 성과를 다 거두면서도 의외의 수확까지 얻은 훈훈한 하루였다.
5월은 햇살이 따사로운 달이기도 하지만 우리네 마음도 더욱 따사롭게 만들어 가게 하는 가정의 달이다. 가족의 각인(各人)이 가정의 주인이 되어 가정천국을 만들어 가시고, 직장에서도 모두 주인이 되어 사원들을 가족처럼 살갑게 살피며 직장천국도 만들어 가시고, 가족을 떠나 있는 가슴시린 이웃들을 돌아보고 한 움큼씩의 정(情)을 나누며 세상천국을 만들어 가는 5월이 되시라 지심(至心)으로 기원한다.
2007년 5월 2일
명상의 집 : 대화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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