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음(知音)
지음(知音)이란 ‘소리를 알아줌’이라는 뜻으로 마음까지 깊게 잘 통하는 절친한 벗의 의미로 발전하였으며 백아절현(伯牙絶絃)이라는 중국 고사(故事)에서 유래한다. 백아절현의 고사는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 때의 일화로, 거문고 명연주자인 백아가 수십 년 만에 비로소 그의 음악세계를 제대로 알아주며 장단 맞추어주던 종자기(種子期)를 만난다. 그 종자기가 죽자 무덤에 가서 통곡을 하며, “내 음악을 알아줄 자 없으니 더 이상 거문고를 뜯은 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하며 칼을 꺼내어 거문고 현을 끊어버리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청소년 시대에 이 고사를 듣고 얼마나 감동하였던지 뜨겁게 오열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 누군가에게 종자기 같은 지음이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내 생애에 종자기 같은 지음을 만날 수 있기를 빌기도 했었다. 그 나이에 누구나 다 꿈꾸어 보는 작은 소망이기도 하려니와, 사실 평생을 두고 우리 삶속에서의 은근한 소망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의 한 평생,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외로운 여행길이다. 목을 걸고 몰입해 가고자 하는 자신의 가치관에 있어서나 심지어 소박한 생활고에 이르기까지의 속마음을 통통 털어놓고 나누며, 편안하고 감사하며 시원하기까지 한 벗을 얼마나 지니고 살고 있을까 자문해볼 때에, 어쩌면 우리 모두 묵묵(黙黙)으로 답하며 고독을 수용하고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다. 이제 반평생을 확실히 넘어서고 있는 듯한 나이의 요즈음,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을 넘나들며 삶에 의미 있는 말씀들 혹은 경험들을 깊게 반추해 보는 시간이 잦다. 지음(知音)이 그 하나이다.
정호는 올해 다섯 살의 남아(男兒)이다. 미운 일곱 살이라는 말이 있는데 요즈음은 미운 다섯 살이라고 한단다. 정호도 요즈음 한창 미운 짓을 해댄다. 쉴 새 없이 떠들고 움직이며, 뭐든지 자기 고집대로 하려고 하고, 어른들의 말 꼬리를 따라서 흉내 내고, 많은 말들을 거꾸로 뒤집어서 말도 안 되는 반대말로 따라해 보는 등등 미운 짓이라 이름붙일 만한 행동을 상당히 한다. 무엇보다도 정신이 없을 정도로 나댄다.
그 엄마아빠는 주기적으로 나의 처소로 와서 내 내담자가 되어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상담을 한다. 그날도 아이는 떠들며 왔다 갔다 하고, 소리도 지르며 엄마 곁에 와서 슬쩍슬쩍 보채기도 하는 등 다소 소란스럽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때 정호엄마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며 울고 있었고, 아빠는 묵연히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있었다. 나 또한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밤이 이슥하여 우리가 자리를 틀고 일어나고자 할 때 즈음에 정호가 가까이 다가와서 한 말이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이은 정호의 행동에 모두 눈시울을 적셨다. “정호야, 이제 가서 자자!”고 하는 엄마의 권유 다음의 정호의 말, “엄마, 엄마의 엄마랑 산으로 올라간 이야기 다시 해 봐! 응? 응?” 하는 것이었다. 그 부분은 우리가 나눈 이야기 중의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부분으로서 모두 눈물로 함께했던 곳이었다. “아니, 이 아이가 그 소란 중에서도 그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 부분이 가슴에 그 어떤 의미로 다가갔단 말인가?” 우리는 놀랐다. 그래서 물었다. “정호야, 왜 그 이야기가 듣고 싶어?” 정호의 대답, “그냥, 그냥, 빨리 해줘!”
그래서 나는 다시 그 부분만 요약해서 그대로 들려줬다. 그러자 정호는, “엄마 아까처럼 다시 울어봐!” 하는 것이었다. 엄마가 우는 시늉을 했더니 화장지를 한 장 빼어내서는 엄마의 눈물을 오랫동안 닦아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엄마가 또 물었다. “정호야, 그 이야기 듣고 어떤 느낌이었어?” 하자, “마음이 슬펐어.”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는 참으로 놀라고 감동되어 한참 말을 잃었다. 겨우 다섯 살 된 아이가, 그것도 그렇게 소란스럽게 존재하고 있던 아이가 그 말을 경청하며 깊게 함께하고 있었다는 것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더욱 믿기 어렵도록 놀라웠던 것은, 내가 다시 그 부분의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을 때의 정호는 태도는 식탁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아주 진지하고 조용하게, 오직 잘 듣겠다는 자세로 잠시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때까지의 그 소란스러운 모습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진지한 모습으로 말이다.
다섯 살 난 어린 자식이 이런 지음이 되어주다니, 그것도 어미의 생애에서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의 슬픔을 이토록 깊게 함께해 주다니...........! 정호엄마의 한 평생이 다 위로되는 듯, 천하의 외로움이 다 가셔지는 듯했다. 평생 잊지 못할 참으로 감동스러운 장면이었고, 두고두고 무엇인가를 깊게 생각하게 하였다.
자신을 잘 알아주는 이가 없다고 하며 우리는 더러 외로움 타령을 하곤 한다. 이때 되돌아 볼 일이다. 자신은 다른 누군가를 외롭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른 누군가의 지음이 되고 있는지 말이다. 평생을 두고 단 한 사람의 지음(知音)을 만난다 하여도 그는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옛 어른들은 말한다. 2고수(鼓手) 1명창(名唱)이라 하였던가! 명창 뒤에는 늘 명고수가 있었다 한다. 백아가 절현을 한 심정을 다시 절절히 느껴보면서 세상 모두의 지음이 되고자 하는 오만은 가히 삼가더라도 다만 몇 사람에게라도, 아니 오직 한 사람에게라도 종자기 같은 지음이 되어보리니 하는 고운 원(願)을 가만히 다지기도 하고, 주변의 모두를 명창으로 만들어내는 고수가 되지는 못할망정 가까운 주변 사람들의 심정을 외롭게 만들지는 않도록 좀 더 깨어있어 보자는 결심을 거듭해본다. 아집(我執)의 정도만큼 주변의 마음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것임은 틀림없다. 이러한 원리는 끝내 우리를 종자기도 되게 하고, 명고수로도 만들어 줄 것이다. 겨우 다섯 살 밖에 안 된 정호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 어미의 눈물을 닦아주던 장면을, 그 눈빛을 평생 기억하리라.
폭염의 8월이다. 허나, 자성(自省)의 칼날은 어느 철에든 늘 서늘하다. 아집에 대한 서늘한 자성으로, 종자기의 무덤가에 선 듯 시린 그리움으로 불볕더위를 식혀본다.
2007년 8월 2일
명상의 집 : 대화(大和)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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