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나는 삶 1
세상에는 좋은 향기들이 참 많다. 꽃향기를 비롯하여 과일 ,차(茶), 풀, 나무, 음식 등등의 향기가 있다. 좋은 향기는 누구나 다 좋아하는 것 같다. 나 또한 그러하다. 나는 특히 차(茶)와 매화(梅花), 그리고 난(蘭)의 향기를 매력적으로 느낀다. 아마 많은 사람들도 그러할 것이리라.
곡우(穀雨) 5일 전후에 딴 아직 여린 찻잎을 덖어서 만든 차를 우전차(雨前茶)라 한다. 잘 끓인 물을 약 70~80도 정도로 식혀서 우려낸 우전차 향기는 찻잔을 아직 입에 대기도 전에 벌써 코끝에 번져 감도는 향기가 스르르 눈을 감게 한다. 이른 봄에 느껴보는 우전차의 향미는 마치 가녀리게 고운 몸맵시 여인의 한복 차림 모습을 연상케 하는 맛이다. 차를 마시면서도 몸가짐을 한결 단아하게 가다듬게 하는 맛이다.
채 겨울이 가기도 전에, 먼 산에는 잔설(殘雪)이 아직 코끝을 시리게 하고 있는데 묵은 매화나무의 텅 빈 가지에서 청아하게 피어있는 매화 꽃송이. 바람이 불어와 꽃잎을 흔들 때마다 허공에 흩어지는 매화꽃 향기는, 그리고 꽃잎 하나를 따서 코끝에 갖다 대면 온 몸으로 번져 흐르는 그 향기는 가슴 깊은 곳에서 맑은 눈물이 솟구치게 한다. 청상(靑裳)에 홀로된 중년 여인의 고고(孤高)하고 원숙한 기품을 떠올리게 하는 향내로서, 길고도 차디찬 겨울의 모진 바람을 이겨내며 피운 품격을 예찬하는 눈물이다. 매화향기는 그리움을 자아내게 한다. 있지도 않은 임조차 그립게 하는 향기이다.
난(蘭) 향기는 또 어떠한가! 세련되고 우아한 선(線)의 예술미를 유감없이 나타내 보이는 잎들 사이에 쭉 올라서 있는 꽃대를 보면 벌써 환희로워진다. 얼마나 서서히 꽃망울을 터뜨리다가 어느 순간에 활짝 피어 그 향기가 주변 공간에 진동을 한다. 겨우 한 줄기의 꽃대에서, 몇 송이 송글송글 피어있는 그 작은 꽃잎에서, 어찌 그다지도 커다란 향내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렇게 진동하는 향기가 어쩌면 그다지도 밀밀(密密)함과 은은(隱隱)함을 지닐 수 있는지, 가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난초의 향기를 맡고 있으면 그 모습과 향기가 너무도 세련되고 담박하여, 따라 고요해지며 멋스러운 기분이 되게 한다. 마치 능력 있고 멋있는, 그러면서도 소란스럽지 않는 정장 차림의 처자의 모습을 그리게 한다. 참으로 매력적인 향기이다.
이 뿐인가! 우리의 고향 냄새들은 어떠한가! 풀 향기 흙냄새는 어떠하며, 구수하게 구워내는 감자 고구마 내음, 창자 속 깊숙이까지 따숩게 하는 보리밥 내음, 상추 배추 오이 가지 내음, 내음새들...........! 사람을 그립게 하고, 삶을 애착하게 하며, 인생을 노래하게 하는 냄새들이다.
그림에서도 글씨에서도 향내가 난다. 글씨에서 풍기는 깊은 향훈(香薰)에 매료되어 오열을 한 적이 있다. 지금부터 약 30년 전의 일이다. 고향의 포교당에서 불교에 처음 입문하여 불교 기초교리 등을 배우던 때이다. 그때 포교당 주지스님께서는 매일 붓글씨를 몇 시간씩이나 쓰셨다. 언젠가부터 차분히 앉아서 하루 두세 시간 씩 먹물을 가는 일이 내 업무가 되었고, 덕분에 이른 나이에 묵향(墨香)을 흠씬 마셔보는 은혜를 누렸다. 그 때였다. 구성궁 예천명(九成宮 醴泉銘)을 만나게 된 때가.......구성궁예천명은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중국 당나라 때의 서예가 구양순(歐陽詢)이 쓴 비문으로서, 구양순이 남긴 작품 중 최고로 손꼽히며 해서(楷書)의 극치로 칭송되고 있다.
구성궁예천명 체본(體本)의 첫 장을 여는 순간 숨이 턱 막힐 듯한 감동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가만히 오열을 터뜨렸다. 한 점, 한 획에 완벽한 근엄함이 서려 있으면서도 격조 높은 부드러움을 포괄하며, 빈 틈 한 구석 없는 듯한 균형미 속에서도 뛰어난 품격의 변화미를 담고 있다고 평하는 글씨이다. 바로 그 느낌, 그 향기가 일감(一感)으로 와 닿았던 것이다.
그 글씨를 접한 이후 내 속에서는 구양순 해서체 글씨의 격(格)이 하나의 지향인격(指向人格)으로 승화되어 그 이미지와 향기를 그려보는 것이 내 인생의 한 기쁨이 되어 왔다. 한 올의 생각에도, 일성(一聲)의 말마디에도, 작은 몸짓의 동작 하나에도, 깊은 근엄함과 치우침 없는 부드러움이, 그리고 균형미와 변화미가 격조 높게 흐르는 인격을 그리며 흠모(欽慕)해 왔다. 지금도 그 묵향을 잊지 못하며, 지금도 그 그리움을 그만두지 못함이 또한 나의 비밀스런 재산이기도 하다.
인생의 맛을 아주 쬐끔 알게 된 지금의 나이에 내가 알아야 할 또 하나의 향기가 있다. 사람 향기이다. 그냥 마냥 느껴지는 사람 냄새이다. 그 어떤 향기가 고매하다고 한들 정(情) 담고 살가운 사람 내음새만 하랴!
장맛비가 시작되어 하루 종일 후줄근한 비가 내린다. 한가롭고 홀가분한 마음에 우산도 받치지 않고 산책을 나갔다. 참으로 오랜만에, 내리는 비를 거침없이 흠씬 맞아볼 요량으로 그냥 나섰다. 처소 뒤로 난 농로(農路)를 좀 걷노라면 뒷산 자락 밑으로 이웃 마을 밭 두락이 기다랗게 뻗쳐 있다. 아니 그런데 이 무슨 일인가! 팔십은 족히 넘으신 듯한 할머니 한 분이, 허릴랑은 90도 정도 굽혀진 노인이, 비옷을 입기는 하셨지만 절반은 바람에 벗겨져 젖은 옷이 허름한 형색을 하고서는, 부슬부슬한 빗줄기 사이로도 또렷이 보이는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우거진 감자밭 고랑 새에서 나오시지 않는가! 곧 캐게 될 감자 밭이랑 사이의 물을 빼고 나오시는 듯했다. 마을은 제법 떨어져 있고, 밭일하러 나오기에는 너무 궂은 날씨요,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굽은 허리와 초췌한 형색의 노인께서, 저 밭에서 나올 식량이 되면 얼마나 된다고 이 우중(雨中)에...........?
“그렇지, 그렇지, 이것이 삶이지, 이것이 인생이야!” 고요한 탄성이 토해지며 가슴이 시큰거렸다. “누구를 위해서다냐, 도시에 나가 있는 자식들이 어미의 오늘 이 모습을 아는가, 모르는가!” 작은 이마의 겹겹 주름살에서 읽어지는 숱한 애환의 내음, 유모차에 의지하여 겨우 허리를 펴고 내쉬는 긴 숨에서 맡아지는 노인장의 단내, 그러나 얼굴만큼은 아무 부러움도 욕심도 없다는 듯, 인생을 달관한 듯 일없어 보이는 연륜의 내음......... 내가 사람이라는 것이 실감되고, 사람인 것에 긍지를 갖게 하는 내음새였다. 누구를 위함도 욕심도 아닌 듯, 그저 평생의 평범한 일상이라는 듯, 초연하고 무심해 보였다. 그 낯빛, 그 광경에서 느껴져 오는 삶의 향기, 사람의 향기는..... 우전향 매화향이 뛰어나다 한들, 구양순의 붓끝 향이 하늘에 닿는다 한들, 지금 이 향기에 비할 수 있으랴! 평생 비릿한 젓갈 냄새로 저미어 있던 내 어미의 손과 몸베 자락에서 맡아지던 그 진한 삶의 내음새를 그립게 한다. 사람의 내음, 삶의 내음, 그보다 더 우리를 감동시킬 수 있는 향기가 있을까보냐!
바람에 벗겨진 비옷 모자를 고쳐드리며 나지막한 인사를 건네자, “어이쿠, 고맙구먼!”하신다. 짧은 한 마디 정감을 주고받고 돌아오는 내 가슴은 훈훈함과 숙연함으로 꽉 찼다. ‘고맙구먼!’의 한 마디에는 인생을 온전히 다 아시고, 내 속을 훤히 다 아시는 듯한 노익향(老益香)이 그득하여 하늘의 축복처럼이나 들려졌다. 입가에 든든한 미소가 밴다. 나도 세월 묵고 묵어 더 묵은 사람이 되어 난초(蘭草) 지초(芝草) 화초(花草) 잡초(雜草)가 일초(一草)로만 보이고, 똥이나 돌(石)이나 돈이나 도(道)나 일색(一色)으로만 느껴짐이 자연스러이 그러할 때에, 내 작은 한 마디로도 하늘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향기를 담아낼 수 있을까? 이 오만한 그리움이 새삼 오늘의 내 재산이게 하신 할머니께 감사하며 저녁 기도에 든다.
2008년 6월 18 일
명상의 집 : 대화 합장
* 명상칼럼의 글 애독자 님들께!
그동안 명상칼럼에 올렸던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으면서, 그리고 어머니를 먼 곳으로 보내드리는 큰일을 겪으면서 근신하는 마음으로 두어 달 칼럼의 글을 쉬었습니다. 송구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없잖아 있기도 하지만, 권해봄직도 한 책인지라 편안히 권합니다. <내안으로 떠나는 행복 여행 / 장승 출판사, 대화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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