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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컬럼

NO1작성일 : 2015-11-11 오후 10:20
제목
73. 나를 뭣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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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뭣이라고.............!                      - 대원행(大願行) 발원의 소박한 이유들1 -

 

요즈음 한층 한가로운 마음이 되어 거의 매일 한두 시간 씩 걷는다. 무심히 걷기도 하고, 가만히 사유해 볼 만한 주제가 있을 때에는 그 주제에 몰입하며 걷기도 하고, 하늘과 산과 들판, 그리고 풀꽃이나 바람의 느낌들을 지긋이 감상하며 걷기도 한다. 좀 걸어보자 하면 뒷산 아래로 길게 난 농로를 따라 걷게 마련이어서 논밭에서 작업하고 계시는 마을주민들과 마주치기 일쑤이다. 요즈음 시골 논밭에서 만나는 분들이라 하면 대체로 연세가 드신 어르신들인지라, 한량하게 놀고 있는 것 같이 보일까봐 죄송스러워 마주쳐 지날 때면 한결 공손한 마음을 담아 인사를 올리며 미안 닦음을 한다. 동네 주민들은 나의 짧은 인사에도 큰 배려를 받은 듯 다정하고 넉넉한 답례를 해 주신다. 그럴 때마다 느껴지는 푸근한 시골인심에 마음이 더욱 선량해지는 듯하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맛 중의 하나이다.

 

언제부턴가 노인들께서 유모차를 밀고 다니시는 모습을 길에서 적잖게 본다. 허리가 꼬부라지고 다리에 기운이 달리니 유모차에 의지하여 걸으시는 것이다. 매우 큰 도움이 되신다고들 한다. 맨 처음 어느 분의 아이디어인지 모르겠으나 늘 감사히 여긴다.

산책길에서 자주 마주치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신다. 건너 마을에 사시는 분으로서 그분도 유모차를 밀고 다니신다. 엊그제의 일이다. 할머니께서 밭에 가시는 방향이 걷고 있는 나와 같은지라 인사를 드리고는 내 키를 낮추어서 허리와 등을 좀 쓸어드리며 할머니의 보폭에 맞추어서 걸었다. 몇 발자국 안 가서 할머니께서는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는 내 손을 잡고 말씀하신다. “애고, 애고, 감사해라이. 나를 뭣이라꼬, 내가 뭣이간디, 이 늙은이한테 이렇게까지 해 주누?”  “무슨 말씀이세요. 바로 이웃이요, 부모님 같으신데........허리가 이래 가지고........얼마나 힘드시겠어요?” 할머니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내 손을 잡은 악력(握力)이 더욱 세어짐 속에서 할머니의 마음을 요모조모 더듬어보며 나도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이 자그마한 배려에도 이토록 깊은 의미와 감동을 가지시다니, 우리가 작은 친절도 아끼지 않아야 함의 이유이다. 문득 얼마 전 가까운 노인복지시설 방문 때의 일이 떠오른다.

 

장수 읍내에서 약 6킬로미터 지점에 <훈훈한 동네>라는 노인요양시설이 있다. 그곳에는 자녀가 있는 분들도 계시고, 무의탁 노인 분들도 모셔져 있다. 약간의 기부도 하고 노인 분들을 위문도 할 겸해서 갔다. 사무실에 들렀다가 윗층으로 올라가 방방의 한분한분 손도 잡아드리고, 다리도 주물러 드리며 인사를 드렸다. 모두 얼마나 반기시며 기뻐하시는지, 이렇게도 좋아하시는 것을 자주 찾아뵙지 못함이 참으로 미안했다. 그 중 몇 분은 “나를 뭣이라고 이렇게?” 말하시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 이후 오래도록 그 말씀, 그 눈빛들이 지워지지 않았다. “나를 뭣이라고..............”

그 작은 봉사가 그 눈물을 나게 하다니, 우리에게 주변을 잠깐씩 둘러보며 시간과 에너지와 그 밖의 것들을 아주 조금이라도 나누며 살아가게 하는 이유가 된다.

 

우리 동네 종선이는 올해 스물여덟 살이다. 내가 이 마을에 들어올 때에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고1 때부터 까닭 없이 하체 마비가 와서 학교도 그만두고 방안에 들어앉아서 생활을 한 지가 벌써 10년이 넘는다.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나 참으로 놀라운 것은 몸은 부자유한데도 어찌 얼굴은 그토록 평온하고 밝은지, 그리고 자신의 시간 운영을 잘 하며 노는지, 오히려 우리의 안쓰러운 마음을 무색하게 한다. 한번씩 찾아가면 어쩌면 그렇게 환하게 웃을 수도 있는지......! 아빠는 안 계시고, 엄마는 읍내 식당 일 가시고, 팔십 넘은 할머니께서 밭농사 일과 함께 낮으로 종선이를 돌보신다.

그 종선이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끔씩 제과나 빵을 사다가 방에 넣어주며 다정하게 안부 물어주는 일, 그리고 혹여 어느날 문득 일어나 걸을지도 모른다는 꿈을 가지고 기도 올리는 일이 전부이다. 동네 순복음 교회 목사님이 계시는데 매주 한번 씩 종선이를 봉고차에 태워서 읍내 목욕탕엘 데리고 가 목욕시켜 주신다. 종선이는 바깥세상 구경도 하고, 몸도 개운하게 씻고, 무엇보다도 사람대접 받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종선이 할머니께서는 늘, “우리가 뭣이기에!”를 연발하시며 목사님에 대한 은혜가 하늘같으신 듯 말씀하신다. 나도 그 목사님이 존경스럽고 감사하다. 그로 인해 종선이 엄마와 할머니는 그 교회의 열성신자가 되셨다. 능히 그러심 직하다. 이 얼마나 훈훈하고 보기 좋은 모습들인가!

 

“내가 뭣이간디!”

“나를 뭣이라고!”

“우리가 뭣이기에!”

 

이것이 어찌 이들만의 탄식이라 할 수 있으리오. 세상 모두의 마음을 대변한 목소리가 아닐까 한다. 관심과 배려에 언 마음이 녹고, 비좁은 마음이 커지며, 굳어 있는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번 이상씩 꼭 체험해 본 삶의 원리 중 하나일 것이다.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 마디에 심기일전하여 죽음 같은 고독과 난국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든가, 스쳐지나가는 미소 한 컷에 생기와 희망을 얻는달지, 국수 한 그릇의 보시에 힘을 얻어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죽도록 노력하여 장안의 큰 부자가 되었다든가 등등의 미담들은 우리의 주변에 적지 않다. 또한 우리의 가족이,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세상이 안정되지 못하고 고통스러울 때에 우리도 함께 직간접적으로 앓고 있음을 본다. 우리가 함께 행복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확실한 이유이다. 이 우주의 존재방식, 존재원리가 중중연기(重重緣起)로 되어 있음을 안다면, 정녕 안다면 그 이유는 더욱 명확하게 손에 잡히게 될 것이다. 어릴 때의 한 기억이다. 모두가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가던 시절인데도 거의 모든 가정의 부엌에 가면 구석에 작은 항아리가 있었다. 가족이 먹을 한 끼의 식량에서 한 숟가락의 쌀을 떠내어 모아 두는 곳이었다. 물론 한 술의 절약정신도 읽어낼 수 있지만, 그 한 술, 한 술 모아진 것을 나중에 시주로 바치든지 이웃을 위하여 쓰는 것을 상례로 여겼다. 오늘날 기부문화의 씨앗이 된 듯하다. 이 얼마나 알뜰하고 따뜻한 나눔의 행(行)인가!

 

이러한 광경에 대한 기억들, 그곳에 스며있는 정신들, 주변의 따뜻한 일화들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 모두의 행복을 빌며 세상 행복을 위해 살고 싶게 하는 대원(大願)의 가치관을 심어주고,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동력이 된다. 동사섭 문화에서 추구하는 대원의 가치관, 대원행의 실천, 이는 우리가 이미 나름대로 살아내고 있는 소박한 삶의 모습이다. 우리가 서로 관심하고, 위하여 기도하고, 적절히 배려하며 살아간다면 보다 훈훈한 세상이 될 것이고 하늘이 보시기에도 기쁘시리라! 저 백장선사께서, “하루 일하지 않았으면 먹지 말라! (一日不作 一日不食)”고 하셨다 한다. 이 세상 모두의 행복을 비는 신실(信實)한 기도와 발원으로서 오늘의 내 밥값을 대신할 수 있을지..........!

 

이 세상 모두의 행복을 오롯한 맘으로 빕니다.

이 세상 모두의 행복을 위한 눈에 띄지 않는 디딤돌이 되겠습니다.

이 세상 모두의 행복에 기여하는 소리 없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되겠습니다.

세상 행복을 위해 숨쉬고, 닦겠습니다.

세상의 조화로운 존재함을 위해 모든 아집(我執)을 놓아가겠습니다.

 

 

 

2007년 6월을 보내며

명상의 집 : 대화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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