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老年)의 향기
사람이 감동을 할 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사람을 성숙시키는 직간접의 여러 요인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 가운데 <감동> 또한 중대한 요인 하나로 꼽힐 것이다. 사물, 사람, 일, 사건, 책, 영화, 드라마, 자연, 지나는 행인의 표정 한 컷, 어떤 사람의 한 마디 말, 종교 등등, 우리가 접하는 모든 것들에서 얻는 하나하나의 감동 자락들이 우리 영혼을 살찌우고 마음도량의 평수를 넓혀주고 있음을 많은 사람들이 체험했을 것이다.
세상에는 우리를 감동시키는 일들이 참으로 많다. 물론 주로는 제법 무게감 있는 사건이나 상황들에서 감동들을 받곤 하지만 일상의 자그마한 것들 속에서도 우리의 가슴을 움직이게 하는 감동거리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랍다. 늘 생각되는 것이지만 그 가운데 사람을 통한 감동이 그래도 각별한 듯하다.
지난 장날의 일이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제자가 방학을 하여 돌아왔고, 부산과 서울에서 각각 손님도 한 분씩 오셨다. 마침 읍내 5일장이 서는 날이고 유난히 국수를 즐겨 드시는 제자의 비위도 맞춰 주고 싶어서, 그리고 도시 분들의 시골장터 인심도 구경시킬 겸해서 점심으로 장터 국수를 대접하기로 했다.
국수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몇 팀들이 자리를 잡고 계셨고 우리 일행도 중앙쯤의 빈 자리를 차지했다. 국수와 보리밥을 주문해 놓고서는 벌써 나는 잔잔한 행복감이 들었다. 저만치의 구석에 앉으신 두 노신사 분들의 얼굴 표정과 대화 나누시는 모습이 유난히 눈에 띄었고, 한참을 아니 식사하는 도중 내내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매력을 느껴서이다.
두 어른의 연세는 아마 70세는 넘으신 듯했다. 머리칼이 거의 하얗고, 이마와 얼굴 전체에는 고운 주름이 가지런하다. 낮술을 들고 계셨다. 맥주 두 병이 이미 비워진 상태이고 소주 한 병의 마지막 잔을 서로 따라 주고받고 있는 중이었다. 안주는 마른 강냉이 튀긴 것과 깍두기와 오이 겉절이, 그리고 콩나물 무침이 보인다. 장날 시골 장터 밥집에서 내놓는 안주답다.
적당히 기분 좋을 만치 마시신 듯, 두 분의 얼굴에는 홍조가 가득하시다. 가까운 친구처럼도 보이고 서로 매우 존중하는 지인으로도 보이는 두 분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시며 주고받는 대화의 모습에서 노숙(老熟)한 여유로움이 흐르고 있었다. 좀 떨어진 거리인지라 대화내용이 들리지는 않지만 그 대화는 두 분을 충분히 만족시키고 있는 듯 했다. 미소와 웃음이 만면(滿面)한 얼굴, 서로 앞서 많은 말을 하려고 서두르지도 않고 조용조용 상대방을 공감하고 북돋우며 나누는 모습, 얼른 보아도 서로에 대한 해묵은 정감을 담고 있으면서도 또한 상호 예와 격을 은은하게 갖추고 있었으며, 간만에나 만난 듯 반가움이 담뿍한 모습, 한번씩 몸을 천진하게 흔들며 크게 웃으시는 모습 등 하도 보기에 좋아서 내 점심국수 먹는 일이 한 켠 뒷전의 일이 되었다. 한 분은 허름한 잠바와 낡은 검정 구두를 신으셨고, 다른 한 분은 한참 유행이 지나간 듯한 색 바랜 양복과 때가 좀 묻어 있는 하얀 구두를 신으셨다. 차림새의 어느 것도 다 고운 의미가 부여될 정도로 두 분의 나눔 모습은 이미 내게 큰 감동으로 와 있었다. 잘 차려 입지 않아도 속에서 배어나오는 멋이 저런 것이려니 하며, 말 내용은 듣지 못 하였어도 사람의 깊이 있는 나눔의 맛이 저런 것이려니 하며, 두 분의 멋스럽고 맛스런 모습에 흠뻑 젖어 절로 내 얼굴 가득 미소근육이 지어졌다.
우리 일행들이 먼저 나오게 되면서 나는 내 감동과 기쁨의 대가로 그 분들께 약주 대접을 해 드리고 싶었다. 주인 아주머니께 그 탁자 것까지 계산하고는 그 분들이 누구시냐고, 이 지역 분들이시냐고 여쭈었다. 그 분들의 신분을 듣고서는 더욱 놀라웠다. 한 분은 초등학교 교장 정년을 하신 분이시고, 다른 한 분은 신협 이사장을 오래 역임하셨던 분이시며 동기친구는 아니라고 전했다.
사회활동을 하실 만큼 하신 분들이라도 정년을 하고 나면 활동하실 때의 품위가 그대로 유지되기가 쉽지 않다는 말들을 들어온 터이다. 또 가까이서 그런 분들을 뵙기도 해 왔다. 정년 후 얼마지 않아서 자칫 과거의 명예를 돌아보면서 현재가 초라하게 여겨지기도 하여 삶의 의욕이 떨어지고 자신감이 낮아지면서, 작은 것에도 예민해지고 서운해 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기가 서툴러지고, 그리하여 품위유지가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고들 한다.
잠깐 뵈었지만 현재 사회활동을 하시는 것 같지는 않은 듯한 이 분들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무엇인가에 연연해 있지 않은 녹녹한 한가로움이 엿보였다. 활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냥 존재함으로서 충분한 역할이 되어주고 있는 듯한 여유로움이 함께했다. 평온하면서도 활기 있게 보였다. 이러한 향기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궁금했다. 어떤 가치관을 갖고 계신지, 하루의 일상은 어떠하신지, 평균 행복도는 어느 정도이신지 등 구체적인 관심이 기울여졌다. 나는 그분들 앞으로 다가가서 인사를 올리고 나의 정체를 밝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고운 모습들을 찬탄도 드리고, 약주 보시도 알려드렸다. 서로 다음에 한번 뵙는 기회를 갖자는 막연하고도 낭만적인 약속을 하고 나오면서 나는 그것이 다만 의례적인 인사가 아님을 스스로 알았다. 돌아오며 나는 깊은 한 생각에 잠겼다.
누구든 나이는 든다. 따라서 아름다운 노년을 운위하는 사람들이 많다. 두 노신사 분들의 속내를 정녕 알 수는 없는 일이로되 그 날의 그 모습은 얼마나 보기에 좋았던가! 그를 계기로 하여 닮고 싶은 노년의 구체적 모습을 스케치해 본 하루였다. 건강하고 탄력 있는 젊음도 아름답지만 한가롭고 넉넉한 노년의 모습은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는 믿음을 다지게 하는 하루였다. 그리고 아름다운 노년을 위해 무엇을 애 써 가야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해 본 짐짓 진지한 하루였다.
2008년 8월의 하루
명상의 집 : 대화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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