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눈물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성장, 성숙에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 몇 개를 들라 하면 <사랑>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식물들도 사랑과 기도의 에너지를 더한 정도만큼 더욱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란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어 있다.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사람으로서의 일생을 안정적이고 환하게 하는 가장 으뜸의 요소는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사랑 중에서도 부모님의 사랑이 그 기초를 이루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부모님의 사랑을 거론할 때에 흔히 엄부자모(嚴父慈母)로 통칭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표현이 생략된 채로 주로 엄한 지도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어머니의 사랑은 다정하고 자애롭게 감싸 안아 주는 모습으로서 가슴에 새겨져 있다. 물론 어떤 사람의 경우는 다른 모습이 있기도 하겠지만 한국가정의 대체로의 모습은 그렇다. 여기 비록 표현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었지만 뜨겁게 심금을 울리는, 떠올릴 때마다 훈훈하게 눈시울을 젖게 하는 어느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속울음을 조심스러이 옮겨본다.
약 23년 쯤 전 어느 수련생이 장(場)에 내어 놓은 아름다운 일화이다. 그때 그 분은 삼십 대 초반 미혼여성으로서 강직하며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대학시절에는 학생운동에도 한 역할 했었고, 직업 역시 정의사회 구현을 구호로 내세우는 직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분은 장녀로서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이유는 아버지께서 표현이 별로 없으시고 무뚝뚝하며, 너무 권위적이셨다는 것이다. 또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를 보면, 오순도순 오가는 말마디가 거의 없고 아버지의 일방적인 지시 태도와 어머니의 순종적 양처(良妻)의 관계였다 한다. 그래서 따님께서는 아버지에게 비우호적이었고, 하교나 퇴근 후에 집에 돌아와서도 서로 냉랭한 분위기로 각자 자기 공간에서 최선일 뿐이었다 한다.
그 아버지께서는 약주를 즐겨 드셨는데, 언젠가부터 거나하게 취한 날에는 꼭 복숭아를 한 봉지 사들고 오셔서는 온 식구들에게 거의 강제로 먹도록 권하곤 했다 한다. 이 따님은 그조차 마음에 영 들지 않아서 아주 반항적으로 거절하곤 했는데, 복숭아가 날 철이 아닐 때에는 복숭아 통조림을 사 오시었다고 한다. 그러시기를 수 년 동안 하셨는데, 30의 나이 되던 해 여름날 월간 잡지 한 페이지에서 발견한 정보 하나를 읽고서는 소리 죽여 뜨겁게 울었다 한다. 복숭아가 폐를 튼튼히 하며 기관지를 건강하게도 한다는 것이었다. “아! 아버지는 내가 담배 피우는 걸 아셨구나. 아시면서도 모른 척하시면서 이 딸년의 건강을 걱정하고 계셨구나! 그리고 이 못난 딸의 자존심을 생각하여 직접 나무라시지도 않고.............이게 아버지 사랑이구나.” 그날, 오랜 세월 굳어왔던 아버지에 대한 딱딱하고 냉랭한 마음이 봄눈 녹듯 녹으면서 천하를 얻은 듯 마음이 그득하여 어딘지 모르게 늘 있어 오던 외로움이 가셨다 한다. 대학 막 들어가면서부터 배운 담배를 그날 이후로 끊었다 한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태형이 아버지는 4년 전에 돌아가셨다. 내가 태형이네 가족과 알게 된 것은 약 12년 전 태형이 대학 1학년 때이다. 태형과 그 어머니께서 같이 수련을 다녀가신 후 친근히 지내게 되었는데, 독실한 불자(佛子)이기도 하고 또 어머니의 극성스러운 요청으로 태형을 양자(養子)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이후 태형이 부모님은 일년에 몇 차례 정도 명상의 집을 방문하여 함께 의미 있고 다정한 시간들을 갖곤 했는데, 그때마다 태형이 아버지는 수줍음과 점잖음 탓에 당신 표현이라고는 몇 말씀도 안 하시고 눈도 잘 못 맞추시고 가만히 웃기만 하다가 가시곤 했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하라고 아내가 애정어린 투덜거림을 하면, “우리 태형이 기도만 잘 해 주시면 되지 뭐!” 하시면서 마치 내가 무슨 큰 능력자나 인격자라도 되는 듯 든든히 여기셨다. 그 아버지로부터 세 차례 정도 전화가 왔었다. 매번 바깥인 듯 소음이 수런수런했고, 몇 잔 들이키셨는지 발음이 고르지 않으셨다. 전화 내용도 간단했다. “스님-!, 감사합니데이, 그라고요 사랑합니데이.” 딱 그 두 마디가 전부였다. 잽싸게 당신 말만 하시고는 도망가듯 전화를 끊으셨다. 그렇게 수줍음 많고 말수가 적으신 양반이 약주 한 잔 하시고는 자식의 은사스님이라고, 자식을 위해 늘 기도해주고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고마웠던지, 불끈 용기 내어 전화버튼을 누르신 것이리라. 눈시울이 뜨거웠다. “아, 아버지 사랑이구나!” 아직도 귀에 생생히 울리는 그 목소리.......그것이 아버지 사랑이었다.
이렇게 아버지들은 약주나 한 잔 들어가야 깊은 속 소리가 자아올려지는 것일까? 내가 스물 셋 되던 해에 내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는데, 그 23년 동안 아버님과 나눈 대화가 과연 몇 마디 쯤 될까를 잘 더듬어본다면 열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도 있을 정도이다. 내 아버님도 말씀이 적으시고 근엄하셨던 분이시다. 그러나 세월 흘러 나이 들수록 아버지의 과묵(寡黙)하심과 어떤 때의 고함(高喊), 그리고 때때로의 매정한 회초리 속에 담겨 있는 깊고 따사로운 사랑을 더욱 알아간다. 오랜 고가(古家) 한옥 구들장에서 느껴보는 그 은근한 온기와 향기를.................
아버님 가시기 얼마 전 마루에 걸터앉아 지긋이 마당을 응시하시면서 눈에 물이 고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간간히 떠오르는 그 모습, 그 눈물의 비밀을 여쭙지도 못하고 아버님은 가셨다. 오십을 훌쩍 넘은 이 나이, 아버님이 살아 계신다면 약주 한 잔 올리며 이런저런 속 소리를 좀 들어드릴 수 있을 텐데............긴 세월 나눔 미학의 가치와 구체적 방법을 수련 및 안내해온 사람으로서 아쉬움이 각별하다. 이 땅의 아버지 이름을 가진 모든 분들께 약주 한 잔 올리는 이 마음, 왠지 참 좋다. 아버지들의 표현이 좀 적고 서툴더라도 세상의 온 가족들이 다정하고 훈훈한 대화로 잘 풀어가면서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시라고 기원하는 마음이다.
2009년 9월
명상의 집 : 대화 합장 (daehwa@dongsasu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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