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깊게 생각해 보는 것들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다. 행복이란 <좋은 느낌>, <기분 좋음>이라고 뜻매김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체 행위의 동기는 기분 좋음을 위함이기 때문이다. 왜 수면하느냐 하면, 자면서 휴식을 취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져서이다. 잘수록 기분이 나빠진다면 아무도 잠을 자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 세수를 하는가. 왜 화장을 하는가, 왜 먹는가, 왜 지식을 탐구하는가, 왜 일을 하는가, 왜 사랑을 하는가, 왜 돈을 버는가, 왜 결혼을 하는가, 왜 아이를 가지려고 하는가, 왜 여행을 하는가, 왜 종교를 신봉하는가? 이 모든 이유는 <기분을 좋게 해 줘서>이다. 이는 초등학생도 의심 없이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간단한 원리를,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것, 행복이란 기분 좋음이라는 것을 명쾌하게 안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세월이 갈수록 고개 끄덕인다.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았다고는 하나, 참으로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님을, 격물치지(格物致知)하고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요즈음, 내가 알고 있다고 여겼던 것들을 의식 창고 속에서 하나씩 꺼내어 곰삭히듯 명상해 보는 일들을 일삼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인생의 목적은?>이요, <행복이란?> 등이다.
인생의 목적이 <그것>이라면 앉으나 서나, 죽어나 사나 그것을 위해 헌신해야 할 것 아니겠는가! 그것이 <기분 좋음>이라면 앉으나 서나, 죽어나 사나 기분 좋음을 만들어 가야할 것 아니겠는가? 삶의 목적에 온전히 깨어 있다면 말이다. 기분 좋음을 간절히 원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다. 그 이유는 목적을 분명히 해 둠이 부실했기 때문이다. 삶의 목적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삶의 목적을 <세상 모두의 행복>이라는 대원(大願)으로, 이 원(願)이 얼마나 가치 있는 염원인가를 깨닫게 하고 실천토록 하는 안내자 역할을 수 십 년 해 왔음에도, 생활 속 소소한 일에 봉착하여서도 순간 실족하곤 한다. 행복의 반대쪽을 살고 있다. 부끄럽고 고소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는 숙연한 순간이기도 하다. 다행히 어떤 실족의 순간에도 <삶의 목적>을 자문(自問)하면 시퍼렇게 정신이 든다는 점이다.
행복이 결과물이라면, 행복의 조건들은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숱하게 많다. 이것들은 곧 우리의 환경이다, 어떠어떠한 상황이다. 이러한 환경, 상황 여하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 결정된다. 일반적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때에, 정신 차리고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될 과제가 있다. 우리가 바깥에 있는 상황, 환경의 여하에 우리의 행복을 맡길 것인가, 아니면 바깥 상황이 어떠하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태도로서 우리의 행복을 관리해 갈 것인가의 선택 문제이다. 달리 말해 본다면, <행복 여탈 권한의 주인을 밖에다 두겠는가, 아니면 자신의 내적 태도로서 행복을 결정해 가는 주인이 되겠는가?>이다. 이 또한 천 번, 만 번, 억 만 번 생각해 보며 다지고 다질 일이다.
내 아들, 내 남편, 내 아내, 내 상사, 그 사람이 제발 바뀐다면 좋으련만. 나에게 이만큼의 돈은 생겨야 할 터인데. 내 얼굴이 배우 아무개 정도는 될 일이지 왜 이 모양으로 생겨가지고? 성형이라도 해야 기분이 좋아지겠는데. 왜 나는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왜 그것은 저기에 있지 아니하고 여기에 있지? 아들의 병이 나아야 내가 행복할 터인데, 등등의 상황은 우리의 소원(所願)들이요, 소원 성취를 위해 노력해 가야할 우리의 과제들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슴 아프게 절박한 소망들도 많을 줄 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 노력만큼 얻어지기를 늘, 간절히 기도한다. 원 성취 기도만큼이나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나를 포함한 세상 모두가, 행복 여탈 권한을 밖에다 두지 말고 내적 태도에 의해 행복해지기를 늘, 간곡히 기도한다. 이를 30년 넘게 수행하고, 또 안내자 역할을 수 십 년 해 온 사람임에도 이 또한, 여차하면 실족하곤 하는 것을 본다. 그때마다 여지없이 점검되는 사실 하나는, 태도가 부실하다는 점이다. 다행히 그 어느 실족의 상황에서라도, <지금 네 행복의 열쇠는 어디에?>를 자문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동사섭 문화에서 권장하는 가치관 1호는 삶의 목적을 공고히 하자는 것이다. 동사섭인의 삶의 목적은 대원 즉, 세상 모두의 행복이다. 일체 행위의 동기를 세상 모두의 행복으로 둔다. 그리고 세상행복을 위한 확실한 기본 태도 둘을 안내한다. 돈망(頓忘)과 지족(知足)이다.
바로 본 즉 나[我]와 세상[法]이 텅 비어 도대체 의존할 곳이 없음을 확지하고 오롯이 무심(無心)으로 깨어있으면 온 천하가 무한 고요요, 순수의식 무한으로 성성하며, 그 자체 천국이다. 그것이 온 천하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자는 것이다. 유심(有心)으로 나와 한 생각 일으킬 때에 지족부터 하자는 것이다. 알고 보면 지족천국이라는 것이다.
왜 돈망인가, 왜 지족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이치를 우선 지적(知的)으로 이해하여 가치관으로 받아들이고, 신(信)으로서 거듭 다지며, 명상으로서 온전히 감(感)이 오게 하고, 삶 속의 모든 행위에서 실현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돈망지족의 삶의 태도에 대하여서도 그 깊이를 더해 가야함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할 만큼 거듭 다지고 다져 가야할 과제이다.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곧잘 실족하고 만다. 우리가 돈망이지 못하고, 지족이지 못해 온 업의 역사가 길고도 깊기 때문이다. 아니, 돈망지족의 가치성에 대한 앎의 깊이가 얕기 때문이다.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게으름을 허용하는 세상에 대하여, 동사섭 문화는 한 마디 촌철로 철퇴를 내리친다. <안다병>,<다 안다병>에서 벗어나라고! 그 길은 오직, 지⦁행⦁득(知行得)으로서라고!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앎으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행으로, 체득될 때까지의 수행을 강조하여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알고 있다고는 하나 정말로 아는가하고 자문해 볼 때에 더 깊게 해 갈 필요가 있는 몇 몇 주제들을, 다시 명상하여 정립해 보며 심신이 개운하고 호흡이 심장(深長)해짐을 본다.
2010년 4월 24일
명상의 집 : 대화 합장 ( daehwa@dongsasu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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