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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고 난 다음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마련이다. 이토록 영롱한 나의 의식이 죽음을 맞음으로써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된다는 것에 대해 인간적인 아쉬움이 없을 수 없다. 더구나 내가 저지른 악행이 아무 의미가 없고, 내가 힘들여 쌓은 선행과 선업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라면, 윤리니 도덕이니 하는 것이 참으로 무의미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12연기를 말하고, 누생의 삶을 지나오면서 쌓아온 업식의 결과물이 윤회를 거듭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믿으면서, 선업을 닦아야 할 필연성을 배운 바도 있다. 만약 이런 것이 공허한 윤리적 종교적 이론일 따름이고, 그저 사람더러 착하게 살 것을 권하는 도덕적 경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삶을 그리 진지하게 살아야 할 당위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를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는 철학적 사유가 필요한 소이다.
우리는 사색의 공덕으로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참으로 없음을 확연히 깨닫고, 그 ‘나’라는 생각 때문에 겪은 갖가지 걸림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면서 ‘나’, ‘나’ 하면서 지극히 좁은 울타리에 갇혀 있던 상태로부터 우주적인 광활한 세상으로 확대되는 무한감을 누리게 되었다. 아무리 ‘나’가 소멸된다고 해도 ‘깨어 있음’으로 대표되는 ‘의식’은 ‘나’로 인식되는 소아적(小我的)인 것이 아닌 우주 법계에 충만한 ‘의식’으로서, 대아적(大我的)인 것의 부분 집합이거나 원소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나’는 우주 법계에 충만한 의식, 또는 의지로서 늘 작용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도 자명한 이치이다. 그리 본다면 내가 저지른 악업은 법계의 한 구석을 흐리게 하는 에너지로서 작용을 할 것이요, 내가 쌓은 선업은 밝고 빛나는 에너지로서 환하게 빛날 것이다. 천하가, 무한 우주가 무량한 복덕과 밝고 맑은 상생 기운으로 충만하게 하는 결정적 인자를 ‘내’가 심고 있는 일이 이승(이생)에서 행하는 것이다. 나의 온갖 행주좌와 어묵동정 속에서 쌓아가는 하나하나는 그러한 의미를 가진 인자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질량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질량이라는 것은 언제나 일정하여서 비록 드러내는 모습이 변한다 해도 근본적인 질량 자체는 항상 일정한 크기를 가진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그렇다면 세상이 끝나게 되어 내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 마치 하루살이가 죽어 먼지처럼 흩어지는 것처럼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본다면, 내 인생의 무게만큼이나 유의미했던 삶과 가치관들은 어디로 가 버리는 것이란 말인가. 그것은 잠시 모양이 바뀌면서 사라지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법계에 충만한 의식의 곳간에 차곡차곡 쌓이고, 필요한 시기가 되면 본디보다 더 위력적인 힘을 발휘하게 되는 날도 올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이것이 의식계에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질량불변의 법칙이다. 비록 전우주의 역사가 끝나고 블랙홀 속으로 빠져 들어가 버리는 공겁이 왔다 하더라도, 법계에 충만했던 의식은 크기가 0에 가까울 만큼 작아졌어도 에너지로는 거의 무한대가 될 만큼 강력하게 존재하리라고 믿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