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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해지는 지름길>
나는 교사다. 신출내기가 아니라 꽤 오래된 경력교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 끓는 성장기 학생들과 함께 하는 학교생활은 녹록지 않다.그런 농담도 있지 않은가. 북쪽에서 남침하지 못하는 이유가 중학교 2학년 때문이라는. 그만큼 학생들은 천방지축이다. 중학생 만일까? 고등학생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과거에는 중학생과 고등학생의 사고 정도가 사뭇 달랐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학생들은 정신 성숙도가 더딘 듯하다. 신체적으로는 성인이 되었을지 모르나 정신은 과거의 초등학생 수준에 머물러 있으니 말이다. 아마도 사회문화적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닐까 싶다. 6,70년대 고등학생은 성인과 진배없었다. 이유인즉,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고 그만큼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시절이기도 해서 일찍 철이 들었다. 그러나 요즘 학생들은 풍요로움 속에서 성장해 어려움을 거의 느끼지 못한데다가 가정교육마저 허술하기 짝이 없다. 그 위에 교사의 생활 지도는 쉽지 않은 일이다. 미성숙한 학생들과 학교 공간에서 부대끼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말이다.
얼마 전 수업시간의 일이다. 한 학생이 책상에 엎드려 존다. 깨웠다. 미동도 않는다. 교사의 지시에 불응한 것이지만 참고 다시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여전히 미동도 없다. 인내를 가지고 세 번째 깨운다. 그 때에야 학생이 반응하며 일어나는데 소리가 가관이다. ‘아이, 씨.’ 이 녀석 봐라. 아이 씨라니! 교사가 수업시간에 잠자는 학생을 깨웠는데 학생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이, 씨’라 생각하니 어처구니없다. 아까부터 조금씩 일기 시작한 불쾌감이 일순 솟는다. 게다가 찌푸린 눈으로 째려본다. 이 녀석아, 수업시간에 자는 학생이 어딨냐. 어서 책 꺼내 공부하자 하니 학생이 그런다. 저 공부 안 해요. 학생이 공부를 안 해? 공부하려고 학교에 온 것 아냐? 아니요. 저는 학교 다니고 싶지 않은데 부모님이 다니라잖아요. 할 말이 없다. 책 가지고 뒤로 가라. 가서 정신이 나거든 들어와 앉아. 학생이 의자를 와당탕 밀치며 일어선다.잠을 깨운 불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교실 뒤편에 ‘서서 공부하는 책상’ 위에 책을 탁 던진다. 그 소리가 거슬린다. 그러면서 뒤에서도 삐딱하게 서서 존다.
이렇게 학습에 관심 없는 학생들이 한 교실에 족히 두세 명은 된다. 정도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들의 행동은 엇비슷하다. 이런 학생들과 신경 싸움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럴 때 마음을 다잡는 방법으로는 <나지사 명상>이 최고다. 학생이 졸고 있으면 ‘졸고 있구나’ 하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무슨 일이 있었겠지.’ 이해하고 ‘난장판을 만들지 않으니 얼마나 감사한가’생각하면 마음의 평화를 해칠 일이 없다. 게다가 수업을 망치지 않게 되니 이보다 다행스러운 일이 없는 것이다. 초기 교사 시절, 나는 <나지사 명상>을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해 잘못을 저지르는 우를 범하곤 했다. 마음이 불행해진 것은 물론이거나와 학생들과의 관계도 악화되고 수업도 망치게 되어 한 가지도 이득이 없는 행위였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나지사 명상>은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최선책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 <나지사 명상>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이에 대해 바로 반응하지 않고 객관화 시켜 '~구나, ~겠지', 감사!'하는 명상법이다. 제1단계가 '그랬구나' 하면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구나’가 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어렵다. 어떤 불쾌한 상황을 느끼고 일어나는 느낌을 감지하고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 그것이 없으면 <나지사 명상>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만다. 상황을 그대로 읽어내면 되는 것이다. 다음이 제2단계인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하면서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다. 상황에 대한 추정을 통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인데 이것은 어떤 상황일지라도 철저히 나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을 다치지 않기 때문이다. 최악의 상황일지라도 지금 이 상황을 발생시킨 원인에 타당성을 부여해야 한다. 그래야 ‘겠지’라는 이해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제3단계인 ‘그나마 더 상황이 나빠지지 않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하는 것이다. 더 나빠질 수 있는데 이만하니, 이보다 더 악화되지 않았으니 얼마나 감사한가를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상황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자신의 평정심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유지하는 것, 그것이 행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조차 행복해야 한다. 아니, ‘지금 이 순간’조차 행복해야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다. 나중에 행복하기 위해 지금의 불행을 참는다는 것은 행복의 궁극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할지라도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행복해야 한다. 종일 서서 일할지라도, 종일 앉아서 일할지라도, 종일 허리 굽히고 일할지라도 일에 경중은 있겠지만 어떤 일이 발생해도 일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생각, 하물며 일이 없을지라도 없어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런 사고에 이르기까지는 <나지사 명상>이 필요하다. 그러고 보면 <나지사 명상>이야말로 행복해지기 위한 진정한 명상법이 아닐까. <끝>
글. 한뜻님 (yso147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