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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컬럼

NO1작성일 : 2015-11-12 오후 08:14
제목
113. 영화에서 깨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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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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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 Paradiso

<영화에서 깨닫다>

 

난 가끔 씨네 큐브에 간다. 마음이 허전하거나 시간 여유가 생길 때면 그냥 간다. 어떤 영화를 상영하는지 굳이 알려 하지 않는다. 씨네 큐브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영화관 측이 영화를 엄선한 이유이기도 하다. <타인의 취향>이 그랬고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가 그랬고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가 그랬다. 대형 자본의 영화를 상영할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독립 영화, 예술 영화에 대한 배려가 남다르다. 아마도 영화관의 가치관이 예술성을 지향하기 때문일 터이다.

특히, 켄 로치의 <빵과 장미>가 그랬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왜 영화 <제르미날>을 떠올렸을까? 에밀 졸라의 원작을 뛰어넘는 영상미와 ‘제라르 드빠이유’의 빛나는 연기 탓이었을까?그러나 그것은 뒷전이다. 서사의 동질감 때문이다. <제르미날>의 ‘랑티에르’나 <빵과 장미>의 ‘샘’의, 비슷한 역할에서 오는 동질감.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사회 조직을 상대로 자신들의 ‘빵’과 ‘장미’를 쟁취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을 테니 말이다. 한 사람이 거대 조직을 상대로 싸워 자신의 권리를 쟁취할 수 있는 확률은 미미하다. 그러나 불가능하지도 않다.

마음 관리도 이에 다르지 않다. 사회적 성공에만 매몰되어 초래된 실패의 흔적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 물질에 지배당한 가족 구성원의 사고방식.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이 현실로부터 얻어진 답답함은 하소연할 그 누구도, 어떤 공간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설혹 성공가도를 달린다 할지라도 헛헛함은 지울 수 없다. 아무리 큰 성공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거대 현실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위로 받을 그 어떤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방법이 있다. 어렵지 않은 방법이다. 그것은 ‘맑은 물 붓기’이다. 먼저 만신창이가 된 나를 응시하자. 아, 내가 지금 삶에 지쳐 있구나. 이 지친 마음을 추스를 수 있은 것은 무엇일까. 그렇게 자신을 찾기 위해 관심이 생기면 바로 마음의 주전자를 찾으면 된다. 그러곤 꾸준히, 끊임없이 맑은 물을 붓는 것이다. 즉 행복 마중물을 만들어 행복한 순간들을 끊임없이 재생해 내는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을 때, 초등학교 시절 칭찬 받았을 때, 친구들과 했던 여행의 순간들, 멋진 풍경을 보았을 때의 기쁨, 업무를 잘 처리하여 상사로부터 받은 칭찬 등 몇 가지 행복 마중물을 만들어 놓고 지속적으로 되새김질해 노력하면 언젠가 마음은 정화될 것이고 행복감이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될 것이다.‘랑티에르’와 ‘샘’이 부조리한 현실을 상대로 지속적으로 투쟁한 것과 다르지 않는 방법이다.

켄 로치와 끌로드 베리의 영상작업 접근법은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전자는 전통적인 반체제, 그러니까 지속적인 반체제주의적 사고의 바탕 위에서 작업을 이루었다면 후자는‘랑티에르’와‘샘’이 그러했던 것처럼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저항하는 방법이었다. 꾸준함. 음식도 장복했을 때 그 효과가 드러나고 운동도 꾸준히 했을 때 그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게 된다. 마음도 다르지 않다.‘랑티에르’와 ‘샘’이 했던 것처럼 꾸준히 맑은 물을 부어댄다면 어렵지 않게 정화된 마음을 얻게 되지 않을까.

영화 <빵과 장미>는 켄 로치의 영화 중 세 번째 작품이다. 스페인 내전을 토대로 한 <랜드 앤 프리덤>(1996), 제국주의 수탈에 대항하는 니카라과, 그곳의 혁명을 기록한 <칼라 송>(1996)이후 미국으로 잠입한 것이다. 그것은 1985년 미국에서 벌어진 이주 노동자 캠페인 '용역 노동자들을 위한 정의(Justice for Janitors)를 소재로 하고 있다.

불법 이주 노동자들이 많은 도시 LA. 멕시코에서 건너온 ‘마야’는 언니인 ‘로사’와 함께 노동조합이 없는 청소 용역업체에서 일한다. 하지만 이민 노동자들의 불법적 신분을 이용한 자본의 이중적인 착취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마야’는 자신이 청소하는 건물에 회사의 명단을 훔치러 잠입해온 노조 활동가 ‘샘’을 쓰레기통에 숨겨준다. 다음 날, 샘은 마야의 집으로 찾아와 미화원들이 단결해서 투쟁해야 한다 호소한다. 샘의 힘 있는 주장에 마야의 동료들은 힘을 얻는다. 동료들의 배신과 반감을 겪기도 하지만 그들은 시내로 나가 피켓 시위를 한다. 적극적 노동조합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넥타이를 맨 몇 명의 말쑥한 변호사들이 빌딩청소 중인, '마야'를 밀치듯이 지나간다. 그 순간 마야의 동료가 말한다. "이 작업복은 마술을 부리지. 이 옷을 입고 있으면 아무도 널 볼 수 없어." 켄 로치는 노동영화 속에서 흔히 등장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분법적 갈등은 오히려 감추고 있다. 그러면서 노동자와 또 다른 노동자와의 대립구도를 전개시킨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하고자 하는 마음과 하지 않으려는 마음과의 관계 속에서 수많은 갈등은 양산된다. 남이 아닌 나, ‘또 다른 나’, 그 나와의 싸움 말이다. 물론 타자, 즉 타인과 체제와의 갈등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나와의 싸움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곧 또 다른 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또 다른 나’로부터 벗어나는 법, 그것이 행복 마중물을 만들어 붓는 것이다. 부정적인 ‘또 다른 나’를 한방에 없애는 것이 간편한 방법이겠지만 이는 쉽지 않다. 무형의 정신적 산물인 타자는 무시로 솟구쳐 나를 괴롭힌다. 그 타자를 순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곧 맑은 물 붓기이다. 하늘이 맑다. 바람도 선선하다. 이 가을의 선선함과 맑음을 우리 모두 가슴에 담기 바란다. <끝>

글.한뜻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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