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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의 여행>
창밖을 응시한다. 환한 햇살 아래 가로수 끝이 노랗다. 벌써 가을이 곁에 와 있다. 바람이 선선하고 하늘은 푸르고 단풍 든 나무가 많아지고 있다. 여행하고 싶은 계절이다. 여행이라!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여행! 그러다 문득 소설 『안으로의 여행』(송기원)이 떠올랐다. 십수 년 전에 읽었던 그 책이 불현 듯 떠오른 이유는 ‘안’이라는 공간 때문일 것이다. 여행은 여행이되 목적지가 ‘안’이라는 사실에 남달랐던 것. ‘안’으로 하는 여행. 그 ‘안’이 궁금하다. 대개 문학 작품이 그렇듯 『안으로의 여행』도 중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공간적 이동을 의미하는 ‘속’으로의 여행이다. 그야말로 밖에서 안, 즉 깊은 공간 내부로의 여행인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내면’으로의 여행이다. 사람이 평생을 살아도 알 듯 말 듯하는 ‘내면세계’ 말이다. 그러나 여행은 우리에게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속삭인다. 공간 이동을 통해 내면에 천착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여행인 것이다. 이 책 또한 그렇다.
주인공 박연호는 서울을 출발하여 인도의 뉴델리에 도착한다. 리시케시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우연히 대학동창 한태인을 만난다. 한태인은 출가했다 사문에서 쫓겨난 후 인도를 떠돌고 있는 인물이다. 박연호는 한태인으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방생이란 애오라지 자신의 어떤 속박으로부터 마음을 해방시키는 일’이라는 조언을 듣고 길을 떠난다. 강고트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하다 물 밖으로 잘못 뛰쳐나온 물고기처럼 갈증에 못 이겨 죽어가고 있는 여자의 환영을 본다. 그녀는 자신이 기자로 있을 때 사랑에 빠졌던 여자이다. 박연호가 인도로 떠나게 된 것은 그녀와 관계가 깊다. 그는 잡지사에 근무하다 30대의 화가를 만나 잉걸불 같은 사랑을 나누다 문득 ‘나는 알맹이가 없는 빈 껍데기’에 불과함을 깨닫고 참을 수 없는 갈증에 시달렸다. 자신의 삶이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때 화가가 약물과다복용으로 죽자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고 아내와도 이혼한 후 인도로 떠났었다.
요가 니케탄과 강가 서원 등을 떠돌면서 명상에 몰입하는 박연호는 명상에 몰입할수록 마음속에 살기(殺氣)가 일렁인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이러던 그가 살기에서 벗어난 것은 굽파와 타포반을 지나 ‘꽃들의 골짜기’에 이르러서이다. 그 망상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꽃들의 골짜기’는 해발 3,700m에서 3,900m에 이르는 분지로 천 가지 종류의 꽃들이 펼쳐진 곳이다. 누구든 이곳에서 사흘만 지내면 꽃들의 향기에 취해 과거 기억을 통째로 망각해 버린다는 전설이 있는 곳. 그곳에서 박연호는 마음에 남아 있던 여자를 떠나보내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그런 그가 본래 모습을 되찾은 곳은 라다크에 있는 ‘레’ 왕국으로 가는 길에서다. 어쩌면 여행의 목적지일지 모른 곳이다. 그곳에서 그는 어둠속에서 버둥거리며 우는 어린아이를 본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자신의 모습이다. 그 본질을 보면서 박연호는 평정을 찾는다. 자아천착의 결과이다.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응시하니 족쇄가 풀리는 느낌.
삶은 관계 맺기일는지 모른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연기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여자와의 만남과 헤어짐, ‘나’ 속에 존재해 있던 ‘또 다른 나’와의 만남, 진정한 자아 천착, 즉 자기 수행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맺기를 원활히 하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여행은 그렇게 얼기설기 얽혀 있는 관계를 정리하기도 하고 새로 맺기도 하면서 깊이 숨겨져 있는 본연의 내 모습을 들여다 볼 기회를 갖게 만든다. 많은 만남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보듬는 과정에서 진정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본연의 모습이란 무엇일까? 순수의식이다.즉 태어나 삶을 의식하기 전의 의식. 맑고 투명한 의식 말이다. 걸림 없는 성정, 시비분별로부터 자유로운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 해 여름,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느낌을 살려보겠노라 혼자 떠난 여행이었다. 2박 3일쯤 올레길을 미친 듯이 걷고 오고 싶었던 것이다. 도대체 삶의 단조로움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없었고 어딘가에 갇혀 있는 듯싶은 나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제주도 올레길에서 가장 풍광이 빼어난 곳은 7코스라는데 나는 그 7코스 시작지점인 외돌개에서부터 거꾸로 6코스를 걸었다. 햇빛은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었고 바람은 없었다. 다만 파도소리만 고요함을 쫓을 뿐. 그러나 지루하지 않았다. 눈 시리게 푸른 바다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그리고 바랜 하늘이 고된 걷기를 위로해주고도 남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쇠소깍을 지나고 남원에 이를 때까지 발바닥에 의식을 두며 느낌을 얻으려 집중했다. 갈증이 심해질수록 느낌은 더욱 선명하게 살아날 터였다. 아침 8시에 시작한 걷기는 저녁 6시쯤 마무리지어야 만했다. 두어 시간쯤 더 걸을 수 있었으나 무리하게 걸은 바람에 그만 발바닥에 물집이 잡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주시로 오는 버스를 기다리며 앉아 있던 남원의 한 정류장에서 순간,몸은 피곤하고 불편했지만 느낌이 선명해져 옴을 환히 느꼈다.
고통의 연꽃 위에 앉아서 그 고통을 통해서 육체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육체를 다스린 다음에야 비로소 정신을 다스리는 단계로 들어서지요. 그리하여 마침내는 정신 속의 어디엔가에 숨어 있을 참다운 자신과 만나는 것입니다. ..... 그리하여 고통을 넘어서는 순간 수행자는 바로 아집에서 벗어나 참된 나, 다신 말하면 우주적인 나를 만나는 거지요. (P.180)
박연호가 현실의 복잡한 의식 공간에 갇혀 살았던들 진정한 자기를 만날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없어 인도행을 감행했듯이 나 또한 현실의 단조로운 일상에서 신선한 촉수들을 느끼기 위해 제주 여행을 떠났었다. 지난한 현실에서 자기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 고통을 감수하고 자신의 느낌을 살려 인간 본연의 순수한 의식을 만나게 된다면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으리라. 가을이 깊어 간다. 먼 여행은 아닐지라도 휴일 교외로 나가 또 다른 나와 만나보는 여행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진정한 나를 만나는 것은 무엇보다 행복한 일이기 때문이다. <끝>
글. 한뜻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