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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 대한 고백
부모는 우주고 자녀는 생물이다. 그러기에 부모는 자녀에게 적절한 때에 햇빛을 쏟고 바람을 만들고 비를 내려야 한다. 그런 자연환경이어야만 생물은 조화롭게 성장할 수 있다. 때때로 햇빛이거나 바람이거나 비가 없게 되면 생물은 생명을 유지하기조차 어려워진다. 지당하다. 생물의 성장은 우주의 운행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으니 말이다. 그만큼 생물에게는 우주의 존재가 결정적이다. 우주는 생물의 모천이다. 즉 부모는 자녀의 근간이며 자녀는 부모의 시원(始原)인 것이다.
아버지가 있었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를 둔 자녀는 그 회한이 결코 가볍지 않은 법. 아버지의 부재는 무시로 돌출되어 삶을 흐트러뜨린다. ‘없음’이 주는 가벼움은 중심축을 상실했다. 허방을 짚는 시간의 연속으로 점철된 고통은 고질이 되었고 그것은 혈류를 타고 사고까지 점령했다. 혹자는 말한다. 반대급부적으로 단단해질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흔치 않다. 대개는 부재의 헛헛함으로 갈등의 시간을 보낸다. 시간을 허비한 셈이다. 멀리 있지도 않으면서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아버지. 버려짐이라든가 무관심이라든가 그런 것과 무관하게 도저히 감출 수 없다는, 운명적인 부정(父情), 그것을 어떻게 은닉재산처럼 감출 수 있었을까. 스토리 없는 아버지. 즉 추억 없는 아버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실낱처럼 가느다랗게 한 가지 추억만 남겼다. 제주도를 다녀와 어깨에 해먹을 두른 해녀와 노란 감귤이 그려진 책받침 한 장을 건넸다. 덧붙인 이야기인즉, 제주행 비행기가 하늘에서 몇 번을 곤두박질치다 제주공항에 도착했다는...... 유명을 달리 할 때까지 오롯이 그것으로만 남아,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간 용타 큰스님께서는 법문하실 때 아버지에 원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제법 많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그러시면서 부모와 자식 간은 곡해, 오해가 쌓이면 곧장 풀어야 한다 하셨고 DNA가 비슷한 친족끼리는 악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관계개선에 앞장서야 한다 말씀하셨다. 그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가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버지에 대한 마음 정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언젠가, 동사섭 일반과정에서는 ‘맑은 물 붓기’를 통해 마음속 아버지에 맑은 물을 붓고 또 부었었다. 그러나 씻기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묵은 때는 더욱 굳어졌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자연스레 마음 홀가분해진 순간이 왔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망이었다.
이제 아버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별세 후에도 그 어떤 아쉬움, 안타까움, 후회, 기대조차 없었다. 존중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전무했다 생각했기에 지족거리조차 있을 수 없었다. 그랬다. 눈시울 적실만한 이야기 한 줄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가당찮은 판단이다. 왜 그랬을까. 나를 존재하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이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인가. 게다가 적당히 큰 키에 썩 괜찮은 몸을 주셨고 경제적으로 윤택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남 뒤지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논밭과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주시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아버지의 행적에 믿음을 갖지 않게 되자 그 어떤 것도 감사로 수용되지 않았었다. 아버지는 그저 부정적인 존재였을 뿐이었다.
최근에야 아버지가 조금씩 이해된다. 두 집 사이에서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할 이야기가 있어도 이쪽저쪽 어디에서도 당신에 귀 기울여 준 사람 없어 또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딕 티비츠는 <용서의 기술>에서 가해자도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 동정을 얻고 싶어 한다 했다. 게다가 모든 것의 원인을 남 탓으로 돌리려 한다 했다. 아버지도 그랬으리라. 자신의 잘못보다는 어머니의 잘못으로, 자식들의 잘못으로, 당시 사회의 잘못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을 수 있다. 그러면서 당신은 열심히 살았고 가족에게 자신을 희생하며 살았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안타까운 심정을 이해하자니 슬프다. 내 말에 귀 기울여 달라 했을 때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은 외로움. 세상과 하직하던 날조차 아무도 곁에 없어 끝내 홀로 삶을 마감해야 했던 그 안타까움.
부모는 자식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한다. 그러나 그 많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했느냐에 따라 관계는 결정된다. 가능하면 긍정적이고 융합적인 부자지간이 되어 화목한 가정의 근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허나 설혹 그렇지 못했더라도 주어진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지족할 줄 알아야 내가 행복할 수 있다. 기왕에 벌어진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은 삶을 지혜롭게 사는 꽤 고차원적 능력임은 분명하다. 나도 그렇게 바뀌어 가고 있다.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해주신 그 공덕이야말로 최고의 공덕이니 말이다. 세상 어디에 있어도 누구를 만나도 어떤 상황에 처해 있어도 지금 이 순간 존재하고 있다는 엄존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끝>
글. 한뜻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