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이 스님을 늦깎이라 하는가 :소나 ▒이 몸뚱이, 이 형해(形骸) 속에서
나는 열 아이를 길러냈네.
그렇게 늙어 허약해진 뒤에
떨치고 나서서 비구니가 되었네.
『장로니게·102』
우리가 한 평생 맺으며 살게 되는 인간관계를 돌아보면 친구나 사제관계, 연인이나 부부관계, 직장 내의 동료나 상하관계 등 중한 인연도 참 많겠지만, 그 중에 한 핏줄을 나눈 부모형제의 인연만큼 지중한 것은 없을 듯 싶다.
그러기에 자녀의 행복을 기원하는 기도의 행렬이 교회와 사찰마다 줄을 잇고, 부모의 사랑을 기리는 여러 가지 사모곡(思母曲)들이 노래마당마다 즐겨 불려지고 있을 것이다. "앞산 노을 질 때까지 호밋자루 벗을 삼아 화전밭 일구시며 흙에 사신 어머님...." 이제 적어도 환갑을 넘겨버린 우리 조선 어머니들의 삶이 진정 그러했기에, 자식된 우리들은 이런 노랫가락만 들어도 그분네들의 삶이 바로 공감되어 가슴이 울려지는 것이리라.
하지만 아무리 지중한 부모자식의 인연이라도 자식에 대한 집착심리나 부모에 대한 의존심리를 면치 못하고 끈끈하게 뒤엉켜 추한 모습을 보이고 마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부모건 자식이건 자기 자체 내에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발견할 수 있게 된 뒤의 사랑이어야 그것이 향기로운 것이지, 언제까지 홀로서기가 되지 못한 상태에 머무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너 없이는 못 산다"하는 식의 미성숙한 관계맺음을 통해서는 도학적 의미의 질 높은 행복을 맛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사위성에는 아이를 열 명이나 낳아서 기르고 교육시켜 여의느라고 세월 가는 줄 모르던 소나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오로지 아이들을 많이 낳아 기르는데 바쳐져서, 사람들이 그녀를 "애기부자"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녀에게 있어서 자식은 삶의 의미의 전부였던 것이다.
한편 소나의 남편은 재가불자로서 부처님을 극진히 신봉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어느 날 시시한 세상일들을 모두 버리고 자신의 삶을 온통 고귀한 정신적 향상의 길에 바치기로 마음먹고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소나로서는 남편의 이런 결정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겨웠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울고불고 해봤자 소용없는 일임을 깨닫고 자기도 나름대로 신행 생활을 열심히 하며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불러모아 재산을 모두 분배해주고 나서 자신에게는 최소한의 필수품만 대달라고 부탁했다.
온 가족이 한동안은 잘 지냈으나 머지않아 이 늙은 홀어머니가 자식들과 사위, 며느리들에게는 짐스러운 존재로 변해버렸다. 자식들은 출가한 아버지의 뜻을 더이상 존중하지도 않았고 신심 두터운 어머니의 심정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적지 않은 재산을 떨쳐버린 부모가 그저 바보로 여겨질 뿐이었다. 부모들이 한낱 정신나간 광신자에 불과하다고 생각되었고, 어렸을 때 가졌던 어머니에 대한 공경심은 어느덧 멸시로 뒤바뀌게 되었다.
자식들은 이제 어머니가 아낌없이 베풀어준 사랑이 얼마나 높고 깊은 것인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도리어 부모가 귀찮고 거추장스런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남편과의 생이별도 견디기 어려웠지만 자식들의 홀대가 소나에게는 더욱 못 견디게 가슴 아팠다. 자식들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으로 속을 끓이던 그녀는 자신이 순수한 모정으로 여기며 베풀었던 사랑이 실상에 있어서는 보상을 바라고 베푼 자기애(自己愛)에 불과한 것임을 직시하게 되었다.
자식들을 보살펴준 보답으로 노후에 부양 받겠다는 생각을 당연시하며 자식들에 의존하여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또한 노후의 외로움과 두려움에 대한 투자나 보험 같은 것이라면 그런 사랑이 순수한 자비라고 볼 수는 없다는 사실에 눈뜨게 되었다.
이런 생각에 다다르자, 그녀는 지금까지의 한 평생은 헛되게 산 셈치고라도 이제부터 당당한 여장부로서 무아(無我)의 자비행을 실현하고픈 열망이 솟구쳐, 늦게나마 비구니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 이제 더이상 사나운 꼴을 보면서 집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게 되었다. 세속생활이 잿빛이요 억압으로 느껴지는 반면에 출가생활은 광명이요 꿈결처럼 연상되었다. 그래서 남편이 걸어간 길을 따라 집 없는 삶, 청정한 삶을 찾아 온갖 것을 떨치고 나서서 출리(出離)의 길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소나 스님은 승가생활에 쉽게 적응하지는 못했다. 늦깎이로 스님이 되어서인지 아무래도 세속에서 길들여진 습관과 생활방식이 걸림돌이 된 것이다. 매사에 있어서 젊은 수행자들과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이 달랐기에 사사건건 흠 잡히기가 일쑤였다. 소나는 곧 승가생활이 꿈꾸어오던 것처럼 낙원만은 아니며, 성과(聖果)를 얻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임을 깨달았고, 자식들이 안식처가 되지 못했듯이 비구니가 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마음의 안식이 찾아오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습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성의 한계에 갇혀있음을 알아차리고서, 수행에 필요한 정진력과 용의주도함을 기르기 위해 갖은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했다. 감정에 지배되어 마음이 변덕스럽게 흔들리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마음챙김과 자기성찰을 오롯이 닦아야 했다. 스님은 늦게 출가했다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늘 절박감을 가지고 수행에 임했다. 심지어는 밤을 잊은 채 좌선을 하다가 하얗게 아침을 맞기도 했고, 남의 눈길을 끌지 않으려고 밤새도록 어둠 속에서 행선(行禪)을 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그녀의 수행이 마침내 득력(得力)의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소나 스님이 아라한과를 이루게 된 계기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려지고 있지는 않지만, 『장로니게』를 보면 스님은 당신 스스로 윤회의 사슬을 끊었음을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다. 이 스님의 깨달음에 관해서는 이런 이야기도 전해온다. 한 번은 도량의 모든 비구니들이 외출하면서, 돌아올 때까지 뜨거운 물을 한 솥 끓여놓으라고 스님에게 일을 시켜놓았다. 스님은 가마솥에 물을 가득 길어다 붓고 아궁이 앞에 앉아 미처 불을 지피지 않은 채 깊은 선정에 들어, 한 순간에 무상과 무아의 법리(法理)를 보고서 번뇌를 여의고 아라한과를 이루었다고 한다.
다른 비구니들이 외출했다가 돌아와서 아궁이 앞에 앉아있는 소나 스님에게 왜 여태 물을 끓여놓지 않았느냐고 따지자, 스님은 아궁이에 불을 지필 필요도 없이 사대(四大; 地水火風)를 다스리는 신통력을 이용하여 가마솥의 물을 즉시 뜨거운 물로 바꾸어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 일을 전해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제멋대로 게으르게 백 년을 사느니, 결연하게 정진하며 하루를 사는 게 낫다"하는 게송을 읊으셨고, 소나를 일러 "정진력에 있어서는 최고의 비구니"라고 칭찬하셨다.
무더위와 한 판 겨뤄야 할 이 여름, 온정을 갖되 집착하지 않는 맑고 담백한 마음나눔을 꿈꾸어 본다. 잉걸불의 뜨거움 속에서도 칼얼음 같은 선기(禪機)를 잃지 않는 정진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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