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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컬럼

NO1작성일 : 2015-11-12 오후 08:31
제목
120. 인생? 모른다. 그러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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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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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모른다. 그러나 안다.>

 

 

지구 위, 대한민국 땅에서 부모의 딸로 태어난 지 육십 여 년이 지났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으니 산하가 여섯 번이나 바뀌는 세월을 살아 온 것이다. 그 세월의 끝머리에서 문득 돌아본다.도대체 인생이 무엇이지? 지금에사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을 용서받는다 해도 그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아니, 우선 무엇이냐는 질문에대해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것인지 부터 생각해 보자. 가령 책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거지? 우선 그 용도를 설명하고, 그 모양을 설명하고, 그 외에 어떤 지적 충족감을 위해서라면 책상의 역사나, 발전사, 혹은 미래상 같은 걸 덧붙이고 등등 하겠지만 문장의 주격이 인생이다 보면 무어라 답해야 할지 참으로 막막하다. 게다가 그 인생이라는 것이 책상처럼 보통 명사인지, 사랑이나 평화와 같은 추상명사인지 아니면 물이니 흙이니 하는 물질 명사인지 조차도 아리송해진다. 인생은 보통 명사 더하기 추상 명사 더하기 물질명사인 것 같고 어찌 생각하면 그 위에 고유명사까지 더해져야 할 것도 같다.

모르고 살아온 것이다. 무언지도 모르고 무작정 살아온 것이다. 마치 프로그램 되어 있는 대로 그저 깡충대고 멍멍대는 장난감 강아지처럼. 창조신이 프로그램 한 것인지, 아니면 인류라는 집단이 프로그램 한 것이지 혹은 그 에너지 들끓는 한국 사회가 프로그램한 것이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 얄궂은 소프트웨어대로 무작정 살아온 것만 같다. 그래서 다시금 인생이란 것을 첫 페이지부터 따져 본다.

내 인생의 첫 출발점은 무엇이었을까? 부모의 만남? 저 식민지시대 일본으로 유학갔던 열혈 청년과 동경으로 유학온 청순한 섬처녀의 만남? 아이고,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아예 아담과 이브의 만남이라고 해야 할 것도 같은데, 어디 아담과 이브가 이슬만 먹고 살았겠는가. 선악과는 물론이려니와 산해진미 온갖 것들 다 먹어대며 살았을 것이고, 어디 먹기만 했으랴, 숨 쉬고, 잠자고, 뒷간 가고, 사냥하고, 농사 짖고, 길쌈하고 등등등으로 따져 나가면 온 우주가 이 중생이 생겨난 연유가 되는 것이다.

도대체 우주는 어째서 사람이라는 이 중생을 만들어 내었을까? 아니, 사람 전에, 사람이라는 포유류의 조상이라는 쥐 같은 동물, 아니 그것 전에 공룡, 아니 그것 전에, 전전전……전전에 어째서 아메바라는 걸, 생명이라는 걸 만들어 내었을까? 그리고 그 생명 속에 들어있다고 여겨지는 의식이라는 것은 또 어떻게 해서 생겨났고 어째서 생겨난 것일까?

지구 위의 산 것들 중에 두 발로 걸어 다니고 혓바닥을 놀려 말을 지껄이면서 자칭 사람이라고 하는 동물이 있는데 어미와 아비 사이에서 생겨난 그것들이 밥 먹고 커가다가 어느 때쯤이면 여자와 남자가 요란스레 만나 저희들도 어린 것들을 만들어내고 그 어린 것들 밥 먹이고 키우느라 지지고 볶고 하다가 차차 기운이 빠지고 늙어서 죽게 되는 한 과정. 인생을 그렇게 보자면 너무도 분명하고 간단한데 그 명확 간단을 한 겹만 들추어내면 저 블랙홀보다도 깜깜한 것이 인생이다. 그냥 깜깜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각할수록 더 깜깜해진다. 과연 이 인생이 무엇인줄 아는 사람이 누구일까? 과학자? 신부님? 스님? 철학자?

나는 모른다. 인생이 무엇인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그토록 애써 살아야 하는 노릇은 참으로 기막히고 허무하다. 무기력증까지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런 나를 구원해 준 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당신’ 이었다! 나랑 똑같은 당신. 인생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장 내 눈 앞에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당신. 말 한 마디로 상처 받고 슬퍼하지만 말 한 마디로 다시 기운을 차리고 미소 지을 수 있는 당신. 그리하여 그 미소로 나를 행복하게 하시는 당신! 끝내 무언지 알 수 없는 인생이 우리에게 마련해준 최고의 신비, 그것은 바로 ‘우리’ 였다. 우리는 나와 너를 그냥 합해 놓은 것이 아니라 나와 너를 뛰어넘은 ‘너-나’이다, 둘이 아닌 너-나.

나는 안다. 무언지 모르는 인생을 사는 방법을. 인생을 사는 방법. 피와 살로, 지금 이 순간 이렇게 뛰는 이 심장으로 생생하게 사는 방법. 너-나가 되어 너-나가 빚어내는 이 무궁무진의 연기적 춤을, 이 무한의 신비를, 이 가슴 다하여 경험하면서 사는 것! 아, 인생은 보통 명사도, 추상명사도, 물질 명사도 아닌 바로 실존(實存) 명사였다! 이생기심(而生其心)이 없다면 음무소주(應無所住)가 무슨 의미이리! 이생기심이 없다면 응무소주 인들 아닌들 무슨 상관이리!

 

“궁극의 회향처는 보시(布施)요 작선(作善)이다. 핵심소임, 수명(隨名)소임, 보시, 감사, 사과, 관용 등의 비소임을 그지없이 작선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고 보니 동사섭의 수심 명상 산책은 인생을 사는 법을 이토록 선명하게, 이토록 간단하게 전해 주고 있다.

글. 선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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