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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깨달음을 줍다>
먼 훗날이 아닌 바로 지금 이대로 우린 누구나 부처다. 수행은 부처가 '되는' 공부가 아니라 부처로 '사는' 공부다. 부처로 산다는 것은 매 순간 깨어 있음을 의미한다.
지난 달, 소요산 자재암에 갔다. 암자로 오르는 길. 나무들은 조금씩 단풍을 달고 있었고 금세 산을 덮을 기세였다. 암자 입구에는 108계단이 놓여 있었다. 그 계단 언저리에 이러저러한 글귀들이 붙어 있었는데 그 중 내 눈을 사로잡은 글귀다. 핵심은 이렇다. 1) 바로 지금 이대로 2) 우린 누구나 부처이니 3) 부처로 ‘사는’ 공부를 해야 하며 4) 매 순간 깨어 있어야 한다. 산길을 걸으며 이 네 가지 의미를 곰곰이 곱씹었다.
1) 바로 지금 이대로
대개는 과거의 잘못을 되새김질한다. 잘한 것을 기억한 경우는 드물다. 이미 지난 것에 집착하며 자책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오래된 잘못을 끄집어내어 생채기를 내고 딱지가 질 만하면 다시 생채기를 낸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위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한다. 또 미래를 위해 오늘을 고통 속에 집어넣는다. 참고 견디는 것이다. 이 또한 어리석기 그지없는 행위이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를 살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지나 가버린 것에, 오지 않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불행을 자초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이 순간’을 사는 것임에도 그렇다. 그러니 ‘바로’ ‘지금’ ‘이대로’ 행복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순간순간 행복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2) 우린 누구나 부처다
용타 큰스님께서도 ‘나는 부처다’를 강조하셨다. 아니 ‘나는 활불(活佛)이다’ 하셨다. 『10분 해탈』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나도 이 문장을 처음 대했을 때 나의 부족한 부분이 도드라져 어떻게 내가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했다. 그러나 ‘나’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깨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보다 귀한 존재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곧 ‘부처’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큰스님께서는 활불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갖춰야 한다 하셨다. 첫째는 일단 웃어야 하고 둘째는 ‘나는 행복하다’ 선언해야 하며 셋째는 ‘나는 없다, 공하다’고 선언해야 한다.(『10분 해탈』p.26~31) ‘이 마음 이대로 부처고 두두물물이 부처고 온 법계에 진리 아님이 없다’ 하셨다. 즉 활불선언이다. 이렇듯 활불선언을 하면 부처의 아이덴티티로 움직이고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부처임을 믿지 못하므로 ‘110 발상’을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미 태어나면서 100점 부처인데 많은 사람들이 부족하다 생각하고 있기에 석가는 110점짜리 부처라 생각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 석가와 나는 겨우 10점 차이밖에 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바로 부처로 행동하고 부처의 혼을 가지고 살아야 할 이유이다.
3) 부처로 ‘사는’ 공부를 하다
부처가 ‘되기’ 위한 공부가 아니다. 부처로 ‘사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나는 부처, 그것도 ‘활불’이기에 어떻게 하면 부처로서 제대로 살 것인지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존엄한 존재인 ‘나’가 이미 ‘부처’이고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상황이므로 제대로의 부처로 ‘사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대개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므로 ‘부처’는 이상적 존재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부처’는 ‘되고’자 하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이미 ‘부처’이다. 그러므로 그 사실을 자각하고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부처’가 될 것인지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파랑새는 고개 너머에 있지 않다. 우리집 처마에 있다. 내가 이미 부처임을 자각하고 부처로 어떻게 하면 당당히 살아 갈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4) 매 순간 깨어 있다
그렇다면 ‘부처로 사는 공부’는 무엇일까? 그것은 ‘깨어 있음’이다. 순간순간 깨어 있어야 하는 공부이다. ‘깨어 있음’은 ‘깨어 있는 의식’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에너지를 ‘여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 분명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고 미래의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과거는 지나갔으니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없으며 현재도 찰나 무상이니 없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니 ’이 순간‘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다. ’절대 현재‘를 잡는 것. 없으니 자유롭고 있으니 사는 것.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인 것이다.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 없으므로 ’진공‘이요 없다고 하기에는 너무 있으므로 ’묘유‘이다. 이것이 절대 현재요 이 순간이다. 삶은 이 순간으로 점철된다. 아공법공(我空法空)인 것이다. 그 진리를 아는 것, 매 순간에 깨어 있어야 한다.
가을이 깊어 간다. 삶에 대한 깨달음도 깊어 가는 것일까?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삶의 의미를 관조한다.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귓불을 스치는 바람도 느끼며 흙내음도 맡는다. 108계단을 내려오며 사는 의미를 되새긴다. 행복은 의식을 ‘지금 여기’에 머무르게 하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노을이 화사하다. <끝>\
글. 한뜻님